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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_castle
1. 제국의 분할 1-1)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사후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일가친적을 몰살하고 형제에게 지금 위치하고있는 곳을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있었다 말한다. 그러나 영토분할에 불만을 가진 맏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막내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를 요구했고 이에 거절당하자 군사를 일으켰다가 콘스탄스의 부하들에게 패배해여 23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이후 두 형제는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느라 서로의 영토에 대해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나 350년 황제직을 노리고 봉기한 장수 마그넨티우스에 의해 콘스탄스가 살해당하자,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우스는 동생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이들을 척결하고자 페르시아와 휴전한뒤 서쪽으로 군사를 돌리게 된다. 뛰어난 장수였던 마그넨티우스는 3..
1.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선술집 딸인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자 그의 부하들은 콘스탄티누스를 후계로 옹립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정치시스템에 크게 반하는 행위였고 이에 많은 전쟁을 겪게 된다. 막센티우스와의 마지막 전쟁까지 끝낸 그는 어머니가 믿었던 신이 자신을 도왔다 믿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1) 밀라노 칙령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의 정제로서 거듭나게 되었으며, 313년 2월 동방의 통치권을 확립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제정하였고 6월 발표하였다. " 전부터 우리(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두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왔다. 뿐만 아니라 ..
교회론적 이단 - 분파주의 오랫동안 지속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신앙을 지키다 죽어간 이들이 있는 반면, 그러한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저버린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타의에 의해 배교했다지만, 평신도가 아닌 감독들의 배교는 분파주의 운동에 불을 지피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한 기독교 박해 후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멘수리우스가 죽게되자 그 후임으로 카칠리아누스가 선정된다. 그런데 그를 안수한 위원 중 하나가 박해기간 중 성경을 버리고 성물을 부수는 등 노골적으로 신앙을 부정한 북아프리카의 주교 펠릭스인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이에 박해 중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엄격파들은 카칠리아누스의 임직을 부정하게 된다. 그들은 카칠리아누스 대신 따로 마조리누스를 선출했지만, 그는 곧 사망하게..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한 우호정책을 펼쳤고 이에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로서 구체화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기독교는 여러 이단의 도전을 받게된다. 1. 교리적 이단 - 혼합주의 아직 체계성을 갖추지 못한 2세기 교회의 교리와 조직운영은 혼합주의가 등장하는데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1) 영지주의 시몬 마그누스에 의해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확대되던 교회의 핵심적 교리에대한 사유들 중 하나로 교묘히 등장한 영지주의는 헬레니즘의 혼합주의적 종교형태로서 이원론적인 사고를 중심으로 교회에 커다란 위협을 가져다준다. 이들은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는 것과 같이 세상을 두가지의 대립으로 인식하였기에 물질세상을 악으로 규정하고 영적인 인식(gn..
고대교회 고대교회는 주전 27년 아우구스투스 집권부터 서로마가 멸망하는 476년까지의 교회를 말한다. 이 기간중 예수그리스도 탄생부터 100년까지를 사도시대, 100년이후부터 서로마가 멸망하는 476년까지를 교부시대라고 일컫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도 B.C27 예수탄생 ~100 313 324 476 사건 아우구스투스 집권 밀라노칙령 박해종결 서로마멸망 시대구분 사도시대 교부시대 아우구스투스는 집권 후 제국지탱을 위한 세금을 걷기위해 호적명령을 내리게 된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이러한 명령에 따라 호적하러 가는 중에 여관을 찾았지만, 묵을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묵게되고 그렇게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게된다. 사도시대 예수의 죽음 이후 열두 제자가 그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들이 기독교에서 흔..
네로(54-68)- 로마 정부에 의한 최초의 박해 -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 - 과대 망상적 광기로 국민들의 혐오 및 로마 대화재 때에 방화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되자, 기독교인들에게 혐의를 씌워 잔인한 박해를 가했다. 동물 가죽을 씌워 죽을 때까지 개에게 뜯기게 하거나, 기름 바른 옷을 입혀 기둥에 묶어놓고 불을 붙여 자신의 정원을 밝히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69-79) -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사후 혼란을 초래한 제국의 내란을 평정한 업적으로 우주의 보존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티투스(79-81)-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예루살렘의 정복자(유대전쟁 66-73) 티투스는 부친의 뒤를 이어 79년 로마 황제가 되었으나, 2년 후에 죽게된다. 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계승했고..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 1. 기독교 윤리 태동의 과정 1) 초대교회와 고전적 기독교 윤리 – 바울, 어거스틴 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바울의 윤리를 모범으로 삼았다. 바울은 구원을 도덕적 삶의 기초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도덕적 삶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이를 이루기 위한 도덕적 삶의 방식을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울의 윤리는 지극히 구원론 적이고, 기독론적이면서 성령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윤리는 당시 제국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제국의 뒤편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철학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악이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선한 것의 결핍이었다. 인간의 도덕적..
판넨베르크의 성령론 판넨베르크의 성령론은 크게 4가지로 나뉘는데, 창조의 영과 삼위일체론 그리고 장의 개념으로서의 성령 이해와 종말론 속 성령이 그것이다. 1. 창조의 영 판넨베르크는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라고 여겨질 때 바르게 이해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자연과학과 성경적 주제들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그의 성령 개념이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의 대화를 위한 가장 포괄적인 신학적 틀을 제공하게 하였다. 그의 체계는 만유가 신의 안에 속하며, 신은 만유에 내재하는 동시에 만유에서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만유재신론과 비슷하다 볼 수 있으나, 그에게 있어 창조 자체는 비 필연적인 사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신론이 그것과 같다고는 볼 수 없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