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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 본문

신학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

유기농막대사탕 2023. 10. 1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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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흐름

 

 1. 기독교 윤리 태동의 과정

 

   1) 초대교회와 고전적 기독교 윤리 바울, 어거스틴

 

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바울의 윤리를 모범으로 삼았다. 바울은 구원을 도덕적 삶의 기초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도덕적 삶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이를 이루기 위한 도덕적 삶의 방식을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울의 윤리는 지극히 구원론 적이고, 기독론적이면서 성령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윤리는 당시 제국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제국의 뒤편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철학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악이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선한 것의 결핍이었다. 인간의 도덕적 문제 역시 인간의 의지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결핍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윤리적 삶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동화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식대로 행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이렇게 이루어진 삶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윤리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국가교회 체제였기에 이러한 그의 생각이 기독교 윤리로써 따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2) 중세 기독교 제국의 윤리와 르네상스 이후의 시대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이성적인 신법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기에 죄란 이성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진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신학적인 덕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초자연적인 은사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세는 기독교의 치세가 가장 컸던 때로 교리가 윤리가 되는 시대였기에, 이러한 그의 주장인 기독교 윤리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유럽 사회는 인본주의와 인문주의, 그리고 순수 기독교가 발전함에 따라 기존에 정체되어 있었던 중세 유럽을 벗어나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이후 계몽주의까지 발흥하게 되면서 신학과 그의 종이었던 스콜라의 형이상학에 대신해서 이성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종교가 아닌 이성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해 낸 시기이지만, 칸트 이전의 시기까지는 도그마가 곧 윤리인 시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3) 현대성과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

 

칸트가 등장하면서부터 당대 시대를 이끌던 성서 주석과 교리신학은 이성으로 완전히 교체되었다. 기존에 기독교라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교회라는 틀을 벗어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에 기독교 윤리라는 개념이 대두됨과 함께 이성이 모든 것들의 판단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교리적인 확증과 도덕적인 소유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이냐는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칸트가 등장한 시기 기독교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학의 조류를 이끈 이들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 트뢸치, 하르낙과 같은 인물이었다. 이들은 교리와 윤리를 구분했으며, 자율적인 이성의 원칙을 중신하면서 이후의 기독교가 고전적인 기독교 언어 및 교리와 결별하도록 하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II.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

 

1) 월터 라우셴부시

라우셴부시는 사회적 위기의 원천을 자연과 인간으로 보았지만, 그가 더 두렵게 본 것은 자연보다는 인간이 만든 위기였다. 그는 인간의 파괴적이고 남을 괴롭히는 행위를 두렵게 생각했다. 인간의 역사를 착취의 사회적 단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으로 보면서 당시에 만연한 사회적 비극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르면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산업화된 현대적 삶이 사회에 촉발했던 파괴적인 힘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의 대응책은 사회에 정의와 물질적인 평등을 가져오기 위해 사회적인 연대를 창조하고 또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기독교적 사랑의 회복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찬송과 기도는 무엇보다 그와 같은 정서들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 운동은 이후 사회복음 운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를 `사회적 질서의 기독교화`로 보았다. 그의 사회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방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춘 그의 생각은 좋았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구속의 성장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교회를 내던져버리는 등, 성서 주석의 전통을 낡고 오래된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기독교를 단지 사회적 진보의 과제만을 위해 활용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2) 리처드 니버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이 문화 안에서의 생활과 온전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혁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변혁은 인간이 어떤 신조나 도덕적 교훈을 다른 것들로 대체시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인격적 대답과 책임 관계에서 되어지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윤리 행위는 무엇을 행할 의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분에게 응답하는 의무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응답한다는 것은 옳거나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적절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포함된 것으로 발견되는 이야기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책임지는 자아는 기독교 윤리학의 핵심적인 용어가 된다.

 

이렇듯 니버는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깊게 형성하는 여러 맥락의 힘에 기독교인들을 적용함으로 타인들을 향해 기독교인들을 개방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있어 그의 윤리 체계는 인격적인 체계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에 심취한 나머지 자연과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인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식에 특별히 강한 감각을 지닌 모범적인 인간으로 표현하는 등 그의 신성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3) 라인인홀드 니버

니버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기독교인들의 규범으로 이해했으나 십자가에서 제시된 사랑의 정치적인 삶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현실의 제 문제들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들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해답을 주려 할 때, 기독교 현실주의가 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개인 및 집단 인간에 대하여 `인간의 죄성`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낙관주의적인 인간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제 주장들은 사회문제를 올바로 파악하지도 못하며, 정치, 경제 등 사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적합한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인간의 죄성을 깊이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기독교 윤리학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성서에 근거를 둔 답변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과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였다는데서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개인과 집단의 도덕을 지나치게 구분하려 한 것과 그가 제시하는 사회 정의의 방향성이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것이라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4) 스탠리 하우어워스

 

공동체주의에서 `공공선`은 공동체 구성원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것을 전통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요인임과 동시에 공공선을 만들어내는 장이 된다. 그렇기에 스탠리하우어워스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본래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 곧 예수에 대한 신앙의 특수성이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어낸 그들의 사회적인 창의성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우어워워스는 단지 기독교인들의 도덕적인 능력 발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확신`이 중요한 것이라 강조한다. 19세기 이후에 근대 자유주의 신학에는 신앙의 확신 보다는 현실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신앙을 입증해 내려고 했기에 신학적인 낙관론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신앙의 확신`에서 나오는 덕윤리와 선함의 근원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그 근본에서 `신앙의 확신`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5) 존 하워드 요더

요더는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이 윤리를 위한 확정적인 패러다임의 원천이 된다고 보았다. 요더는 신약성경의 본문 자체보다도,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가 이질적인 세상과 대면했을 때 신약의 저자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자세히 살핌으로써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때 부딪히게 될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했다. 그들이 기록한 성경 본문 자체보다는 그 본문을 통해 비추어지는 그들의 사유 방식과 사회적 행동 방식으로부터 배우고자 한 것이다. 이는 성경 본문 자체의 내용을 중시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윤리 방법론과도 구별되고, 성경이 윤리적 규범으로서 가지는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현실주의적 윤리 방법론과도 구별되는 태도였다.

 

우리는 이렇듯 기독교 윤리 태동의 과정과 현대 윤리의 근본을 이루는 미국의 다섯 신학자를 살펴보았다. 각각의 인물들이 내새운 윤리 사상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과 통찰을 주고 있다. 그들의 사상에서 배울 점과 비판할 점을 나누어 생각함으로 기존의 윤리 사상을 조금 더 성경적으로 형성시켜 나가는 노력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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