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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리아누스의 신학 본문

신학

키프리아누스의 신학

유기농막대사탕 2023. 10. 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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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터툴리아누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키프리아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줄만큼 서방신학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 서방 교회를 가리지 않고 인정받는 인물이다. 또한, 마틴 루터나 칼빈 역시 유아세례나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신앙 등의 이해에서 1250년 전의 인물이었던 키프리아누스의 생각에 빚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키프리아누스는 처음부터 타고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3세기 초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유복하니만큼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이교의 가정이었기에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245년 혹은 248년 정도의 시기로 추정된다. 그는 세례 후에 집사와 장로의 시기를 거쳤기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세례 후,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의 일부를 나누어 주었고 엄격한 참회와 성서 및 초기 기독교 저작, 특히 터툴리아누스를 공부했다. 그리고 회심 후에 곧바로 우상숭배의 덧없음과 유대인 반박을 논한 Epistola ad donatum de Gratia를 쓰기도 했다.

 

키프리아누스는 데키우스 박해(250-251)때 도망하여 목숨은 구했으나, 소유는 모두 몰수당했다. 교회 내 반대자들은 그를 겁쟁이요, 신앙이 없는 이라고 불신했고, 로마에 고소했다. 이에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피신은 계시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 답했으나. 발레리아누스의 박해시인 258913일 결국 체포되어 카르타고에서 참수 되었다.

 

비록 비굴하게 살아남은 자라는 오명을 쓰긴 했지만, 그가 뛰어난 신학자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가 그를 성인으로서 공경하고 있음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당시의 시대상과 더불어 도대체 어떠한 사상과 신학이 그를 이처럼 부정할 수 없는 신학자로서 우뚝 설 수 있게 하였는지 알아보려 한다.

 

키프리아누스의 교회일치를 위한 투쟁

 

1) 교회 분열의 움직임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지만,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교구에 대한 사역을 계속 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해 끝없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에 그는 결국 251년 교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와 보니 박해의 여파로 많은 교구의 신자들이 배교했음과 더불어 사제 노바티아누스가 이끄는 교회가 그렇게 배교한 이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에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면서, 그들에게는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교자 입교 문제와 관련하여 키프리아누스의 입장은 배교자들에게 일정한 참회 예식을 거친 후에야 그들을 용서 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중에 자신의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은 고백자들과, 펠리치시무스 부제, 그리고 키프리아누스의 주교선출 경쟁자였던 노바투스가 이러한 의견에 반발하며 그에게 대적하였고, 이는 카르타고 교회가 분열의 전조를 보이도록 하였다.

 

로마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로마의 주교였던 파비아누스가 순교하자 그의 뒤를 이어 코르넬리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노바티아누스가 스스로를 로마교회의 책임자로 자칭하면서 분열을 일으켰다. 노바티아누스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배교자 처리 문제에 있어 갑작스럽게 강경노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에 대한 코르넬리우스 주교의 관용정책에 반하는 것임과 동시에 당시 로마에 배교자의 처우를 강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의 심각성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키프리아누스를 공격하던 카르타고의 노바투스가 로마로 건너가 노바티아누스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선출에 패배했던 두 인물은 교회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신들의 만족과 권력 장악을 위해 가장 민감했던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그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대회를 소집하였고 60여명의 감독들이 회의한 결과 카르타고의 감독의견이 받아들여진다. 키프리아누스는 하나인 교회는 평화와 사랑으로 묶인 공동체 이며, 그렇기에 각각의 교회 안에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전체가 하나인 주의 교회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는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것이라는 사도바울의 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는 통로로서 교회를 바라보는데, 이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리카 지역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박해의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 말하며 그를 공격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에 반박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를 돌보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와 같은 내용은 그가 쓴 데메트리아누스에게죽음에 관하여에서 잘 드러난다.

 

2) 보편적 교회 일치의 강조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도나투스에게 보낸 편지를 포함해 죽음에 관하여, 기도에 관하여와 같은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중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저술은 보편적 교회의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라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에서 그는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밖에 머무르는 자들 또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음`을 고백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 하고 있음도 살펴볼 수 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군병들이 제비뽑은 예수님의 옷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무리한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그에게 있어 교회의 통일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을 감독과 연결시켜 `감독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과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감독 없이는 교회도 없다는 것으로, 후대 로마 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키프리아누스가 이와 같이 감독에 대해 강조한 이유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체계가 흔들리자, 평신도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분리주의적 이단으로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모든 감독들의 동등성을 강조한 연방 감독제를 강조했지만, 로마 감독의 수위권을 인정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가 주변의 위협으로 인해 교회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기에 교회가 나뉠 수도 있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러한 그의 강직한 태도는 `이단들에게는 교회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고,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성령도 없다. 왜냐하면 성령도 하나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 또한 이단들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례는 교회로부터도, 성령으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그의 말에서 더욱 잘 드러나며, 그가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왔는지도 알 수 있게 한다.

 

나가는 말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 일생동안 고전분투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교회를 사랑했던 인물은 오늘날에 와서 교권주의의 기초에 있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들은 그의 배교자 입교 문제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에서 성급한 판단을 했기에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얼핏 보면 교권주의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가 주장한 것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신중히 살펴 배교자들을 입교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4권에서 키프리아누스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의 교회론적 주장을 펼치는 것은 그가 키프라이누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그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투쟁했던 보편적 교회의 신학자인 것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교회의 일치를 감독의 일치에 찾은 것이 있다. 교회의 일치는 신앙고백을 그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공교회임이 고백되고 교회의 참다운 연합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프리아누스의 지나친 감독의 강조는 교회를 성령이 계시는 곳에서 감독이 존재하는 곳으로 바꿔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교회의 일치를 신앙의 일치에서 찾지 않은 것은 당시 감독의 권위를 무시하며 교회를 분열시키던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키프리아누스는 일차적으로 감독에 대하여 말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지 신앙의 일치를 경시여긴 것은 아닐 것이며, 이것은 그가 교회를 분열 시키지 않고, 교회를 사랑하였던 고백자들에 대해 존경을 표현한 것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 끝을 파악할 수조차 없기에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교회 일치에 대한 시각들에 부족함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는 분열하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교회를 위한 교회의 사람이었으며, 우리에게 아름다운 신학적 유산을 남겨준 사람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에 그를 평가한 필립샤프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가 가장 유능한 학자였고, 테르툴리아누스가 가장 강력한 저자였던 것과 같이 키프리아누스는 가장 위대한 감독이었다. 그는 교회의 왕자가 되려고 태어났다.”

 

 

 

 

 

 

참고문헌

 

정병식 교수 한눈에 보는 세계교회사, 서울:신앙과 지성사, 2013(개정판)

 

황대우 교수 칼럼 키프리아누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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