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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구원론 비평 본문
칼빈의 구원론 비평
한국은 칼빈 신학을 따르는 장로교회와 웨슬리 신학을 따르는(감리, 성결, 나사렛, 구세군) 교회들이 주류를 이루며 발전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과 웨슬리 신학을 서로 비교하며 이해, 비평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에 다음에서는 몇 가지 주제에서 웨슬리와 칼빈의 차이를 이해하고, 웨슬리를 중심으로 칼빈의 신학을 비평해보려 한다.
구원의 대상 : 이중예정 vs 선행 은총
칼빈이 이해한 하나님의 구속은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권에 귀속되는 사건이다. 즉, 칼뱅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인 이중예정설은 인간 구원의 출발임과 동시에 완성이다. 칭의도 하나님의 선택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칼뱅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뱅에게서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선택, 혹은 이중예정으로 환원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칼빈이 강조하는 `예정`은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지만, 칼빈과 같이 해석하면 절대적 예정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칼빈이 말하는 이중 예정은 `개인`에 대한 예정으로서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창세 전에 예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와 달리 예정을 `구원의 방법`을 미리 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시키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 믿음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데, 인간은 이를 선행은총에 의해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 예정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값없이 주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다고 하는데 반해 웨슬리는 때때로 거부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음을 더 강조한다. 칼빈에게는 구원과 멸망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만, 웨슬리에게는 인간 자신에게 있게 된다.
2. 계약신학과 세대사상 : 동시에 공존하는, 상대적 충분성 vs 절대적 충족성
계약신학은 성경의 구속사를 계약의 역사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행위 계약과 은혜 계약으로 성경을 크게 나누어 전망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세대는 각각의 세대에 맞는 구원의 방식을 소유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행위 계약 시대의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고 아담의 타락 이후에 펼쳐진 은혜 계약의 시대에는 원 복음(창 3:15)이 주어졌고, 아브라함에서 모세의 시대에는 할례가 주어졌으며 모세부터 예수의 시대에는 율법이 주어졌고 예수 이후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어졌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모든 세대는 각각의 나름대로 실제적인 구속론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 구속론적 메커니즘에 대한 해석에서 칼뱅과 웨슬리의 차이가 나타난다.
먼저 칼뱅은 절대적인 충족성의 관점에서 계약신학을 이해했다. 이는 아담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세대가 복음과 구원의 약속을 등가적으로 소지하고 있다는 견해로, 개혁주의 신학이 표방하는 계약신학의 이해다. 이러한 이해는 칼뱅의 예정론과 선택된 자의 구원 이해를 해명하는 것에 매우 적합하다. 그러나 칼뱅은 이러한 입장 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기독론적 해석에 너무나도 신중했기에, 구약 본문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웨슬리는 신학이 표방하는 계약신학의 이해 방식은 `동시에 공존하지만, 상대적으로 충분한 것으로` 각각의 세대에 주어진 구속의 은총을 이해한다. 이러한 그의 이해 방식은 세대마다 가지고 있는 구원의 그림자가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완성된다는 코케이우스의 상대적인 충족성과, 칼뱅의 절대적인 충족성을 종합한 해석이다. 즉, 모든 세대의 구원은 실재적으로 동질적이지만 동시에 각각의 세대의 구속에 대한 구원 경륜은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3. 구원을 위한 하나님 은혜의 사역 : 복음적 신인 협동설 vs 신 단동설
칼빈은 완전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범죄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뱅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영원한 축복을 받기에 필요한 신앙과 본래의 완전한 모습인 초자연적 은사는 잃어버렸지만. 지성과 의지라는 자연적인 은사는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하였어도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인간은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상실했고, 인간의 모든 욕망은 계속해서 악을 택하고 행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다.
이제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밖에 없다. 창조와 섭리에서 절대적 주권자인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절대적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인간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가와 상관없이 나타난다. 인간의 죄와 죄책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한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께 은총을 부여받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그 은혜의 불가항력성은 인간의 무능력성과 함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논리로 귀결되는데, 이것을 ‘신 단동설’이라고 한다.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칙에서 웨슬리는 칼뱅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며, 선행은총이 완전 타락한 인간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응답능력을 가진 책임적인 존재가 되게 하였다는 점에서는 칼뱅과 거리를 둔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 안에서 자유한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유한 것이다.’ 은혜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유롭다는 점은 칼뱅주의의 견해와 다르다.
웨슬리에 따르면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을 ‘복음적 신인협동설’ 이라고 한다. 복음적 신인협동설은 결코 인간의 공로사상이 아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회개하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음은, 그 모든 것이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복음적인 신인협동설은 반펠라기우스주의처럼 자연적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고 협동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매우 괴리가 있다. 웨슬리의 협동설은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에서 수동적으로 협력하는 협동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웨슬리의 신입협동설은 “정숙주의”와 “공로사상”과 명확한 차이를 보이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3)고 명하신 성경의 구원론에 충실한 사상이다.
4. 성화에 대한 해석 : 점진적 성화 vs 완전 성화
칼뱅에 따르면 순간적이며 완결된 사건인 칭의와 동시에 중생, 즉 성화는 시작한다. 이 점에서 성화는 순간적 또는 결정적이며 또한 점진적이다. 순간적 성화는 칭의와 함께 즉각적으로 성도의 신분이 변하므로 이를 ‘신분적인 성화’라고도 한다. 즉각적 변화를 통하여 성화는 시작하지만, 거기서부터 성도는 점차적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 신자는 성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완전 성화는 불가능하며, 죽음 이후에야 가능하다.
이렇게 점진적 성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신자 안에 아직도 죄가 남아 있으며, 일생동안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며, 이것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두 본성의 교리’를 칼뱅이 받아들인 결과이다. 거듭난 신자는 옛 본성과 함께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새 본성을 가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다. 그는 진정으로 새로운 존재이지만 아직 완전히 새로운 존재는 아니다. 죄 없는 새로운 성질과 부패한 옛 본성이 죽을 때까지 공존한다. 따라서 성화는 사망에 이르러서야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요약하면 신자는 더 이상 옛사람은 아니고 점진적으로 성장해가는 새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이 과정은 계속되어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완전성화는 웨슬리신학의 핵심이 되는 진리이다. 칼빈은 현세에서 완전성화는 불가능하며 사후에야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나, 웨슬리는 이 땅에서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생한 신자가 아직도 남아 있는 죄성을 깊이 자각하고 주님 앞에 내어놓을 때 신자는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벗어나 정결함을 얻고 사랑의 충만을 얻게 된다. 이것은 중생과는 구분되는 두 번째 은혜요, 변화이며,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자는 이를 경험할 수 있다. 이렇듯 칭의 후에 두 번째 은혜에 의하여, 죄성이 변화되고, 그 빈 마음속에 성령에 의하여 사랑의 충만을 얻게 되며, 이런 변화는 현세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칼뱅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성화가 인간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둘 다 인정한다.
나가는 말
우리는 이렇듯 구원에 있어 웨슬리와 칼뱅이 가지는 네 가지 관점을 비교하며 웨슬리의 입장으로 칼뱅의 구원론을 비평해 보았다. 이로부터 알게 된 것은 구원론에 있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러한 은혜로부터 주어지는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기독교적 진리에 있어 둘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와 칼뱅의 신학은 아주 유사하지만, 아주 작은 차이가 있고, 이 작은 차이가 이 둘의 신학을 나누어 버렸다.
웨슬리는 의견과 기본교리를 구분함으로, 교리에는 타협이 없지만, 의견에서의 차이는 인정했다. 그는 서로의 다른 의견이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방해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다름을 인정했고, 그로부터 진정한 대화를 이루어가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와 섬김이라는 공통된 사역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서로 다른 입장과 자세가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맡은 역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참고문헌>
오성욱, “사중복음 중생론”, 『사중복음 교의학 서설』, 글로벌사중복음 연구소 편, 101-137,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18
한국조직신학회(2019), 『구원론』, 대한기독교서회, pp. 45~68/125~156
한영태, <칼빈과 웨슬리의 신학적 대화>(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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