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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성령론(몰트만의 <생명의 영>을 읽고) 본문
몰트만의 <생명의 영> 제1부 2장
1) 성령의 역사적 경험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매개로 하여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말한다. 거꾸로 역사를 하나님을 경험한 것으로부터 인지하는 것도 역사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하나님 경험은 언제나 회상과 기다림 사이에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현재를 하나의 역사적 현재로 만든다. 역사적 현재는 회상을 통하여 규정되어 하나의 미래를 지향하는 길로 파악된다. 현재는 `언제나 지금` 곧 영원한 지금을 말하며 영원의 범주에 속한다. 영원한 것은 단 하나의 시간, 곧 현재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의 pneuma, 라틴어 spiritus, 독일어 Geist는 모두 비물질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초 감정, 육체가 없는 그 무엇, 초 지상의 것으로서 이해한다. 히브리어 `여호와의 루아흐`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 안에 있는 태풍, 폭풍과 같은 힘이라고 해석되는데, 이것은 경직되어있는 것에 반하여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여호와의 루아흐는 하나님의 활동하는 현재의 사건을 말하고, 초월적 근원인 동시에 모든 살아있는 것의 삶의 힘으로서 내재적으로 활동한다. 즉 하나님의 창조적 힘이 루아흐의 초월적 면이라면 살아있는 것의 삶의 능력은 루아흐의 내재적 면이다.
구약에서 성령은 결코 그의 은사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뜻하는 말이다. 즉 영은 그의 은사 안에 있는 시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이란 말은 이스라엘적인 사용과 관계해서 `쉐히나`곧 하나님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상에 있는 피조물들과 그들의 역사의 특수한 자리와 특수한 시간에 내려와서 거하신다는 표상에 해당한다. 몰트만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쉐히나` 개념에서 기독교적 성령 이해를 도출해 낸다. 쉐히나는 성전 안에 자리를 치는 것과 거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성소 안에 현존한다. 쉐히나는 기도자들의 공동체 안에 현존한다. 이스라엘의 기쁨과 고난을 함께 나눈다. 즉 쉐히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자신의 현존이다. 몰트만은 쉐히나가 성령의 인격적 성격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음과 동시에 영이신 하나님의 감수성을 일깨워 준다고 말한다.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간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기간 동안 메시아적 희망이 최전성기를 이룬다. 그것은 `재난의 이론`이며 귀향에 대한 희망이 포로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은 `주의 날`에 대한 기다림을 그의 구성 요소로 가지고, `파루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그의 구성 요소로 가진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의 종교`였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지극히 메시아적이며, 성령론적 지평들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에 있어서 `여호와 루아흐`의 기능은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의 영이 임한 메시아이다.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 중 하나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자로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자연의 새 창조는 땅 자체에 대한 창조자의 권리와 정의를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역사적으로 장차 올 메시아적 구원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행위`로 기다려진다. 또한 메시아는 하나님의 정의를 민족들 가운데에는 물론 자연 속에도 세우신다.
둘째, 영으로부터 오는 메시아적 백성의 중생을 말한다. 여호와 루아흐는 단순히 성전 안에 거하시고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 여호와의 루아흐는 온 땅의 안과 밖에 존재하시는 여호와의 현존과 내주를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적 대표자로 오심을 강조하기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집단적 희망을 꿈꾸고 있다. 에스겔 37장에서 성령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시는 영이시고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새 마음을 창조하셔서 각 사람으로 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시며,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룩되는 곳에서 거주하시고 활동하신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는 새 언약으로서의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의 부은 바 됨은 모든 생명체의 부활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공동체의 부활을 일으킨다. 영의 오심으로 기대되는 하나님의 경험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이며 지속적인 영의 쉼과 거하심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계시와 전통을 통하여 중재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2) 신학자의 특징적 내용에 대하여
몰트만이 말하는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 이 `생명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우리의 삶을 생동적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영이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의 삶의 경험에 근거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삼위일체에 내적인 근본을 가지고 있다 말 할 수 있는 신적 주체로서의 성령은, 인간의 삶 속에서 삼위 일체적 관계를 확장 시키는 매개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관계로 그리스도의 해방하고 구원케 하는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생명의 영`으로서의 성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은 이 `생명의 영`을 경험함으로써 해방되어야 하고 또한 궁극적으로 구원되어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생명의 영`은 모든 삶을 생동케 하며 긍정한다. `생명의 영`은 삶의 사랑을 통해 살아가려는 의지를 가능하게 하고 삶의 모든 부정과 불의를 창조적으로 변혁시킨다. 그 변혁의 목표는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다. 즉 `생명의 영`은 종말론적 희망의 선취적 담보인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성령은 `삶의 경험`으로 인식된다. 즉 성령이 몸 안에 거하는 일은 주체인 사람의 이성과 의지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짐으로써 경험되는 것이다.
인간 개개의 삶은 경험의 연속이다. 따라서 성령은 그러한 삶 자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이 표현되면 다른 인간은 그러한 표현의 해석을 통해 원 경험자와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 이러한 경험의 공유와 나눔을 통해서야 비로소 인간의 내면 정신세계가 이해되며, 이는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라 말 할 수 있다. 이렇듯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차원을 동시에 지닌 성령의 경험은 하나님의 사귐과 친구 관계의 사랑을 확신시키는, 통전적 신앙을 통한 삶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근대 서구 정신사는 계몽주의 이후 도구적 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점점 짙어지면서 존재의 합리적 구조를 밝혀 모든 사물을 탐구하는 합리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와 객관주의가 발달한다. 이들 사상의 주류에서 경험은 가장 해명되지 않는 것 중 하나였으며, 항상 인식 주체에 종속되어있는 것으로, 근대 세계에서 이해되었다. 이렇듯 경험이라는 생명 현상에 대해 경시하는 현상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 사이를 첨예하게 갈라놓는 이분법적인 세계관과 주객 구조의 인식론에 기인한다. 정신과 육체, 이성과 경험, 주체와 객체라는 데카르트식 이분법은 경험이 가진 가치가 단지 찰나적이며 감각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신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몰트만이 경험에 대해 강조하며 이전의 합리성 강조의 신학에서 경험의 차원을 강조하는 신학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3) 느낀 점
우리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으며. 사고할 수 있는 것들이 가치로서 여겨지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과거에서 행해지던, 우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경험들로 인지되던 것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 이러한 것들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삶에서 얻어지는 참된 경험을 배제하여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바라보도록 만들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을 다룸에 있어, 그 안에 내재 된 진실한 모습을 보려 하기보다, 부의 축적을 위한 소유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되는 세상에서 신은 존재할 수 없는 허구로 남게 된다. 우리의 노력으로 예측할 수 없고 검증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많은 이들은 신을 믿지 않으며, 그것을 믿는 이들이 어리석다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악해져서 벌어지는 일이라기보다 한가지 이념에 빠져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의 무지함에서 오는 결과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의 인간이 그들이 만든 도시 속에서 그들이 만든 예상 할 수 있는 경험의 산물만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것은 소유적 가치에 중점을 둔 오늘날의 사회가 만들어 낸 커다란 문제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과 사회적 무질서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지배적 구조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많은 사회적 무질서와 파괴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된 자연과 인격체의 진실된 빛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진리는 희생자들 손에 있다는 몰트만의 말처럼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희생된 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에서 깨어나 진실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세상을 향해 행해지는 성령의 역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참고문헌>
J.몰트만 『생명의 영』, 대한기독교서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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