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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 본문
들어가는말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가지는 독특한 모습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새벽예배와 장애인 교회다.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간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전통에 더해 수요예배와 금요철야 예배까지 드리는 모습은 그것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는 신실함으로 느껴질 것이고, 그렇기에 이러한 경건의 민족이 가지는 또 다른 특색인 장애인 교회는 그 이름만으로는 사회적 약자인 이들에 대한 독특한 서비스로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장애인 교회라는 이름은 장애와 비장애 집단으로서 나뉜 교회의 분리를 뜻하며, 남겨진 사람들이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교회가 그들을 품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렇듯 성소로서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장애인에게 가하는 차별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행정사무원은 물론 장애인 목회자를 임직하는데 있어서도 직접적 차별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은 장애인 고용거절과 고용을 했어도 이후에 필요한 편의시설의 설치나, 필요한 도구의 비치와 같은 정당한 편의제공에 대한 거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보이는 가장 큰 차별이 바로 이 편의제공에 대한 거부인데, 이것은 교회 내의 모든 시설에 대해 장애인에 대한 이용과 접근이 어렵거나 곤란하여 그곳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의 참여와 활동이 어려운 경우로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애인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할까. 가장 먼저 필요한 자세는 장애인에 대한 직접적 차별을 하지 않는 것에 있다. 교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고용하고 이후 퇴직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장애와 상관없이 신앙으로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하며, 이러한 기능 수행의 중심에는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선재가 요구되어진다. 그렇기에 다음에서는 장애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살펴보고 그것이 현 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 본 뒤 그것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 보려한다.
대주제1 - 성경이 그리는 목회자의 형상 (배경지식)
목회자의 직분을 달기 위한 현실적인 조건은 신학대학원을 졸업 후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하며, 교회의 사역자로서 부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조건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개인적인 체험을 더욱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간증의 시간에는 목사가 하기 싫어 도망가고 피하려 했는데, 도저히 하나님을 피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꽤나 주를 이루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들, 교단과 사회의 조건들 이외에 성경에서 목회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떠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고 한다.
1. 구약이 말하는 제사장의 직분
출애굽기에서 19장에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라.”고 언급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자체로 제사장의 나라가 되길 원하셨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던 이들이 결국엔 금송아지를 만드는 행보까지 보이자,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제사장의 족속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이후 모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출 28:1)고 말씀하시며 족속 중에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이들을 선별하셨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부여받은 자들로서, 해야 하는 일정한 책무가 있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스스로를 성결케 해야 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나오는 제사장의 성결 명령과(출 19:22) 30장에서는 회막과 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만들고,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 할 때에 그곳에서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해야 하며, 이것은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로서 언급된다. (출 30:17-21)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결케 하는 자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레 6:7)고 하셨다. 그렇기에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가지고 제사의식을 수행함으로 자기와 그의 집안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해야 했으며,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케 하는 직분을 수행해야 했다.(레 16:1-29)
셋째, 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과 등잔대의 불 관리 그리고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일을 했다. 레위기 24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성소내의 12개의 진설병을 안식일마다 새것으로 진설해야 했고(레 24:8),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켜야 했던 제사장의 책무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출애굽기 30장에서는 아침마다 등불을 정리할 때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제사장 직무에 대해 다룬다.(출 30:7-8)
넷째, 판결하는 자였다. 출애굽기 28장에서 겉옷 에봇 속에 빛을 뜻하는 우림과 완전을 뜻하는 둠빔을 차고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께 여쭈어 판결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도하는 권세를 의미함과 동시에 대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을 연결하는 다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다섯째, 제사장은 진찰하는 자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암이라는 질병이 두렵게 다가오는 것처럼 당시에 나병은 신의 진노로서 발생한 재앙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레위기 13장에서는 백성 중 피부에 이상이 생긴 자를 관찰하고 그 병을 명백히 하여 공동체를 지키는 일을 수행해야 했던 제사장의 모습이 등장한다.
여섯째, 이스라엘에 율법을 가르치는 자였다. 신명기 31장에서는 모세가 레위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에게 율법을 써주며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매 칠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레 30:9-13)이와 같은 모세의 당부에서 볼 수 있듯,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곱째, 성막의 관리자로서 감독하는 일을 행했다. 민수기 3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겨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아론과 온 회중인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하게 하도록 말씀하신다.(민 3:5-9)
이와 같이 많은 직분을 감당해야 했던 제사장은 그 직책의 수만큼 많은 권한을 가진 자였다. 그렇기에 항상 거룩한 리더십을 갖춘 자여야 했고, 신체적으로도 흠이 없고 건강한 자여야 했다. 이에 대해서 레위기 21장은 몸을 더럽히지 말고, 더러워진 몸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오지도 못할 것이라 말함과 동시에 맹인, 다리 저는 자, 코가 불완전한자, 지체가 더한 자, 발 부러진 자, 손 부러진 자, 등 굽은 자, 키 못 자란 자, 눈에 백막이 있는 자,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 고환이 상한 자들과 같이 몸에 흠이 있는 자들은 화제를 드리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2. 신약이 말하는 목회자의 정체성
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감독과 장로의 자격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구약의 제사장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두 가지 자격 조건과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 제시되는 것들은 오늘날의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로 제시되는 목회자의 자격은 지도력이다.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은 감독을 대해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임과 동시에(딤전 3:2; 딛 1:6)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딤전 3:4)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치 가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듯 하는 이러한 표현에 대해 디모데 전서는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하고 덧붙인다. 즉, 바울은 믿음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가정에 비유하였고 목회자는 한 가정의 가장과도 같은 위치에 서있는 자임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장으로서 그가 속한 가정을 잘 인도하고 이끌어야 하는 것처럼 감독역시 교회의 구성원들을 잘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또, 감독의 지도력을 다루면서 등장하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공동체에 있어서 목회자는 그 구성원들에게 존경받는 자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처럼 책망 받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성적 정결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시 말하면 결혼생활에 충실하고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는 것을 목회자의 조건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는 만연하였던 그리스·로마의 문화로 인해, 이혼과 간통 그리고 동성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로 인해 부부의 관계가 깨어지고 금욕주의가 성행하는 등 결혼 그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고전 7:1-5) 그렇기에 교회의 지도자는 생활함에 있어 가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제시되는 목회자의 자격으로는 가르치는 능력이 요구된다. 디모데전서는 감독의 지도력에 대해 언급함과 동시에 그가 가져야 할 또 다른 역량으로 교육 능력을 제시하는데(딤전 3:2), 이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 다음세대에 가르치는 일을 맡은 이들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디도서 또한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고 말하며 목회자의 교육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신약성서는 목회자가 먼저 말씀에 대해 깨달아 실천하는 신실함을 가지고 신도들을 가르칠 때, 그들을 바른 교훈으로 권면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를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자격에 이어 마지막으로 알아 볼 것은 목회자가 가져야할 일반적인 자질에 관한 것이다. 신약성서는 목회자가 그 사역의 바탕으로 갖추어야할 것과 피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절제하고 신중하며 단정하고 (딤전 3:2) 관용한 자세이다.(딤전 3:3) 신약은 목회자가 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성품에 대해 제시하는데, 이는 회중을 이끄는 자인 감독은 그 성품에 있어 인내와 분별력을 가져야함과 동시에 배려하는 너그러운 품성을 가진 존경할만한 자로서 존재해야하는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술을 즐기는 것, 구타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을 제시한다.(딤전 3:3) 바울은 제사장이 술에 중독되는 것을 경고한 레위 전통과 관련하여(레 10:9) 목회자가 무절제한 폭음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으며, 다른 이를 상처 입히거나 돈을 추구하는 자들 역시 그 직분을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들을 모두 갖추었다고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해 디모데전서는 새로 입교한자의 교만을 경계한다.(딤전 3:6)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하던지 간에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공동체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중책을 맡게 되면 교만에 휘둘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교회 밖의 가치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목회자가 교회공동체와 더불어 사회의 존경역시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딤전 3:7) 지도자가 교회공동체 안에서만 존경받고 사회에서는 비난을 받는 이들로 세워 진다면 교회의 위상과 명예가 실추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손상시키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약성서는 목회자를 지역교회에서 성도들을 목양하는 책임을 맡은 이들로 그리고 있다. 이에 베드로전서는 목회자의 사역에 가르치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이 함께 있음을 말한다.(벧전 5:1)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그 삶속에 부여된 사역들을 잘 감당해야 함을 의미하는데, 베드로전서는 이에 대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벧전 5:2)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신약에서의 목회자의 사역은 상담자, 양육자와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비유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이를 위해 교회의 성도들을 잘 양육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주제 2 -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
시대와 사회 환경이 변함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함께 변화해왔다. 과거에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살아가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참담한 현실을 마주할 때도 있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분리와 배제에서 평등이라는 원칙으로 바꾸기 위해 오늘날 우리사회는 부족하나마 장애인복지를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사회 의 다수는 장애인을 동정의 대상으로서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장애인의 한계를 특정 짓는 또 다른 편견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완벽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장애인의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로의 변모를 꿈꿀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처럼 성경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인식이 변화되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구약과 신약을 구분해 각각의 시기에 나타난 장애인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을 살펴보려한다.
1. 구약에 나타난 장애인
고대의 장애인관은 미신적 요소와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발생한 편견들로 인해 형성되어 장애인들이 부당한 처우를 당하게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장애인이 공동체의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을 추방하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특히,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는 영화 300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 것처럼 냉혹한 우생학적 방법으로 장애인에 대한 처우를 행함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박탈하였고, 법전에 장애인과 노약자를 산중에 유기할 것을 명시하기까지 했다.
로마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장애인을 강물에 던져 익사시키거나 투기장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선천적인 장애아는 광장에 목 메달아 죽였으며, 이후에 장애를 얻은 아이들은 살해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잔혹한 장애인 관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시대적 제약으로 인해 편향된 채 굳어진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유대의 민족에도 적용되었고, 이에 그들 역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한계성을 보이게 된다.
구약에 등장하는 부정적인 장애인관은 레위기에서 장애인은 제사장의 가문에 속한다 하더라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규제로 등장하는데(레 21:17-21) 이는 장애인을 신체조건으로서 차별한 경우로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제사장에 대한 이러한 규례는 기독교에서 얼마 전까지 장애인은 성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상의 기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장애인의 인식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오고 있다.
이외에 구약은 죄의 대가나 결과로서 그려지는 장애인의 모습도 등장한다. 소돔에서 룻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를 모독한 이들의 눈을 멀게 한 사건과(창 19:11), 유다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끌려가 눈이 뽑힌 사건(왕하 25:7), 삼손의 눈이 뽑힌 사건(삿 16:21)등이 이에 해당하며, 이외에도 소경과 귀머거리와 같은 단어로 비유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죄의 대가로 나타난 장애에 대해 표현한다. 구약에는 이렇듯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들이 나타남으로 장애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부분이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점칠 된 것은 아니며 여러 부분에 있어서 장애를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서 나온 보호와 소망의 대상으로서 다루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레19:14) 말씀과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신 27:18) 말씀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사회적인 압박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구약 성경은 장애인을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그들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들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격과 영적권리를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이 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출애굽기 4장에서 더욱 확실하게 증거 된다.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명을 거절하려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1) 이 말씀은 모세의 시기를 거슬러 올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장애인이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사회에 대해 이들의 양육을 기대하고 있음을 또한 의미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애인 관은 시대적인 제한성과 한계성이 율법과 융화됨으로 그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관점을 만들어 냈음을 본다. 장애인에 대해 보여주는 배려는 그들 역시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고 생각되게끔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애의 발생을 율법을 어긴 죄의 대가로 보았다는 한계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율법은 민수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대에 따라 살아 숨 쉬는 갱신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기에 당시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가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늘날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올바른 해석의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 신약에 나타난 장애인
신약에서는 장애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여 그들의 생명을 존중함과 동시에 자선과 복음증거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생명에 대한 존중은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과정에서 자주 등장한다. 주인이 하인의 병을 고치려는 것과(마 8:5-13) 부모가 자녀를 고치기 위해 간구하는 경우(막 7:24-30), 그리고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요 5:2-9, 9:1-6)은 예수님이 세상에 의식하는 것 보다 생명을 더욱 가치있게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둘째로, 요한복음 9장에서 나타나는 맹인과 대화에서 예수님은 장애가 발생하는 원인은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서 보고 있는데(요 9:1-6),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심에 있어서, 또 그 뜻을 펼치시는 데 있어서 장애인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며, 장애인 가족이 죄의식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독특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누가복음 14장에서 장애인을 자선의 대상이 됨을 확인 할 수 있다. 예수는 잔치를 베풀 때,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접대하는 것은 이해타산적인 행동임에 반해, 가난한자와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과 같은 장애자들에게 베푸는 것은 그로부터 발생되는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진정한 의미로서의 베풂이 된다고 말하며, 그렇게 할 때 복이 될 것이라 말한다.
넷째로, 베드로의 치유사건은 장애인이 복음증거의 통로로서 사용되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걷지 못하는 자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그들에게 구걸하다가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 받게 됨이 나온다.(행 3:2-10) 이 사건은 장애인들에게 물질적인 동정보다는 근본적인 치료와 구원의 확신이 더 중요함을 시사하고 있으며, 또한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 기간 중 많은 시간을 그를 보기 위해 모인 장애인들과 보내시며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등 인격적으로 참된 사람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그 어떤 비방과 건전치 못한 여론에도 상관치 않으시고 자신에게 나아온 모든 장애인들의 육체적질병과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장애를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개념의 차이라고 이해하셨고, 그들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평등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이렇듯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가 이 땅에 온 목적이 인류의 구원이었고, 장애인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구원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장애인들을 저주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의 영과 육을 소생시켜 사회로 복귀시키셨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통해 예수님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교회의 하나 됨이었으며(요 17:11), 그렇기에 바울역시 서로에게 엄격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밀던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교회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갈 3:26-29)
대주제3 - 한국교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태도, 그리고 변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장애인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기록은 오늘날 기독교가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있어서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곧 장애인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에 있어서 입장의 기초를 형성했다. 즉, 장애를 불순종으로부터의 저주나 불행으로 보고, 믿음으로 치유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관은 장애인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을 매우 부정적이고, 제한적이게 함과 동시에 장애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파트에서는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과 태도에 대해 알아보고 어떻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옮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목회자들의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도는 `약간의 관심이 있다`가 63%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불쌍해서`가 79.3%로 압도적인 이유로 나타났다고 한다. 현장에서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마저 장애인에 대해 `불쌍하다`고 인식하는 이러한 현실은 결국, 교회가 장애인들이 동정이나 구제의 대상이며, 불행을 입었기에 그에 합당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자라는 구약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거나 믿음으로 장애를 고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곤 하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장애는 죄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일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성서는 장애나 질병을 죄의 결과로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역의 계획을 나타나내기 위한 하나의 결과로서 나타날 뿐, 장애나 질병 그 자체를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제외해야하는 대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신약성서에서도 청년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요 9:3)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기적을 베푸는 것 보다 그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새 언약 공동체로 들어갈 수 있게 됨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인식만큼이나 믿음으로 장애를 고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기독교의 인식을 매우 부정적이게 고착시켰다. 믿음이 크면 장애를 고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와 기독교 공동체에게 문자적 해석의 오류를 계속 반복하게끔 해왔다. 예수님이 치유사역을 하실 때 종종 믿음과 병 나음을 연관 지어 말씀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사역으로부터 주어진 언약의 열매이다. 이렇듯 성경을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오늘날 장애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에 있어 오류를 낳았고, 이러한 인식의 틀에 대한 변화가 촉구 되고 있다.
장애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약의 사고와 깊은 연결점을 갖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주류 사상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 오늘날의 사회는 완벽한 신체와 외모 그리고 건강을 최고의 선으로써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이데올로기가 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장애는 불행하고, 치료의 대상이며,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부정적인 사고에 사로잡히게 하여, 결국에는 교회가 장애인과의 통합에 있어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몸 되시며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 연약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으로 오셨는지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약해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 하셨는데, 이는 그가 인간의 연약성을 입으시고 인성에 깊게 참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인간의 육신으로 고통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실 때에도 상흔을 가진 채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것은 그가 신성만을 가지고 계셨다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는 육체와 정신의 완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관점에 대한 변화 없이 사회에서 형성된 관념으로 장애인에 대해 접근하다 보면 장애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평등하게 보려는 태도보다는 계속해서 구제와 봉사와 같은 동정과 시각으로서 대하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 비성경적인 접근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죄의 결과로서 장애를 보는 시선이 가져오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이나 장애를 겪는 당사자나 그 가족이 왜 그러한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는데 집착하도록 한다. 누구에게라도 현재 지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원인을 두고 싶어 하는 이러한 행위는 결국 현실과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연결되며 무의미한 답을 찾기 위해 애쓰게 만든다. 신앙을 가진 이들은 왜?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이 내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할 수 있기에 절망을 딛고 소망을 찾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당사자 뿐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교회도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며, 이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있기에 현재의 치우치고 왜곡된 장애에 대한 인식을 굳어지게 하고 있다.
대주제 4 - 한국교회에서 장애인 목사의 입지
장애인을 품지 못하는 교회야 말로 장애를 가진 교회라는 말이 있듯이 교회는 구성원에 대한 어떠한 차별도 없이 하나 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실상 장애인 목회자와 교인들이 교회에서 겪는 차별과 어려움은 결코 일반 사회의 그것보다 작지 않다. 그렇기에 기사에 제시된 장애인 목회자들이 처한 현실과 그러한 현실이 가져다주는 한계와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① 강성남 목사 / 사랑의아둘람교회
강성남 목사는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사랑의아둘람교회에서 지역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다. 본인도 소아마비로 인한 지체장애를 안고 있는 그는 `교회가 가치 실현에 목적을두고 장애인 교역자를 세워간다면 얼마든지 장애인 목사들도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 소양적인 면에서 일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이 있지만, 현대 교회에서 조차 그것이 용납되지 않기에 장애인 목회자는 무관심과, 차별로 얼룩진 참담한 현실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가 처음부터 장애인을 섬기기로 한 것은 아니다. 15명 정도의 비장애인들이 모이는 일반목회를 해오던 강 목사는 장애인 복지관에서 만난 장애인들의 영적인 상태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는 것을 보고 교회 전체회의를 통해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기로 마음을 모았지만, 어느 순간 비장애인 교인들이 모두 떠나게 되어 장애인 교인들만 남게 된 것이었다.
이에 강성남 목사는 `하나님 나라는 취약 계층이 없고, 영적으로 모두 다 동일하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라고 말하며 장애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 복음의 가치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특히 교회가 실질적으로 장애인 목회자를 세워 장애인 교인들을 세심하게 보듬고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서주길 당부했다.
② 류흥주 목사 / 너와나의교회
뇌병변 1급 장애를 가지고 있는 류흥주 목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에 나가면 장애를 고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꾸준히 출석했지만 몸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귀신이 들리거나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장애가 생겼다고 말하는 교역자 때문에 마음속에 병이 생겼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사용하심을 깨달았고 이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목사는 슈퍼맨이여야 한다. 그런데 그 몸으로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신대원에 진학한 그에게 한 선배가 한 말이었다. 그는 지금은 웃어넘기지만, 당시 이러한 말 때문에 스스로의 목사로서의 자질을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신대원을 졸업했지만 목회는 할 수 없었다. 그가 속한 감리회는 3,000여 개의 교회가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를 불러주지 않기 때문에 그는 결국 사역경험 불충분이라는 미달 사유로 목사안수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장애인 인권운동으로 눈을 돌려 한국뇌성마비장애인 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를 만드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계속해서 싹을 틔우고 있었기에 그는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지방회가 그가 제출한 개척신청서에 쓰여 있는 뇌성마비라는 글자를 보고 자격불충분으로 여러 차례 반려했고, 이에 그는 담당목사를 찾아가 그의 목회 비전에 대해 설명함으로 목사안수는 물론 개척지원금 또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상가를 얻어 예배당을 마련했지만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건물에 오가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던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했으며, 아파트 상가로 이사할 때에는 아파트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에 류 목사는 주민들과의 간담회를 열었고, 가까스로 동의를 얻어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어렵게 시작한 교회는 교인 10명으로 시작하였지만 현재는 매주 50여명이 교회에 출석한다.
그는 이러한 교회 성장 배경에 대해 너와나의교회 주일예배에서는 장애인이 예배를 인도하거나, 대표 기도를 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고 답했다. 이는 대형교회는 장애인 편의 시설을 갖추고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지만, 장애인이 교회 안에서 참여할 수 있는 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그는 “여러 교회가 다양한 장애인 사역을 펼치고 있지만, 획일적이고 일방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면서 프로그램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장애인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들에게 맞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주제 5 - 장애인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의 개선 방안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장애인의 모습을 통해 교회는 장애인에 대해 협소하고 왜곡되게 접근하는 양태를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시각을 신학적으로 재정리하여 올바른 장애인관을 정립하여 하며, 그렇게 할 때 기독교가 장애인을 다룸에 있어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이번 주제에서는 장애에 대한 신학정립의 필요성과 함께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1. 장애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인식의 전환
몰트만은 “우리는 우리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단지 장애만을 보며, 이 장애를 전체 인격으로 확대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단지, 그가 가진 외형적인 모습이나 특징에만 집중하였고, 이를 통해 차별과 구분의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세상적인 형상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에, 장애가 개인의 인격이 되어버리는 잘못된 해석과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장애인 신학의 정립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장애는 죄의 결과이자 벌이며, 그렇기에 장애는 치유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관점을 극복하는 것과 같이 신학적 반성이 선행될 때 가능한 것이다. 장애나 질병이라는 우리의 외형적이고 육체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우리의 본질적인 가치를 손상시킬 수 없다. 따라서 장애인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치유의 대상이기에, 오히려 이들이 장애인 선교의 대상이 되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장애는 종종 죄와 심판의 결과를 보여주는 소재로서 비유되어 표현된다. 그러나 비유적 소재로 쓰인 것을 가지고 그 전체를 이해하려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쓰인 장애는 그것을 가진 이들에 대한 차별적 표현으로서 사용 했다기보다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로서 사용된 것이며, 이러한 해석은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애와 장애인을 바라보는 기독교의 기존의 관점과 이로부터 정립된 장애인 선교의 방법들은 신학적 반성을 통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람보다는 장애에 집중되는 사회적 시선들을 바꿔야 한다. 장애로 인해 겪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깨닫게 되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기에 그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수 없다는 뜻을 깨달아야만 장애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 질것이고, 이것이 장애인 선교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장애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관점의 정립은 교회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교회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사회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 즉, 현재는 사회의 변화가 교회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거꾸로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바람직하기는 기독교 내부의 인식전환이 사회에서의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태도로서 흘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구분 짓는 것 없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공동체, 힘들고 지친 자를 자유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사람보다는 장애를 먼저 보는 기존의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 공동체는 계속해서 성경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은 형태로서 남게 될 것이다.
2 통합공동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은 교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어떠한 구분 없이 품을 수 있는 공간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기독교의 모습은 대부분의 교회가 사랑부와 소망부에 전담사역자를 두어 분리교육을 함과 같이 장애인 사역을 별도로 진행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라도 장애인 사역을 이어가려는 것은 바람직한 생각이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이 강조한 하나 된 몸과 사랑의 실천은 특정 그룹을 분리하여 선교하거나 사역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경향이 장애인을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에서 구분하고, 특수화 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통합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장애인 사역을 하는 교회 교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예배는 통합하되, 성경공부는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로 나타났는데, 이는 통합교육의 방법에 있어서 많은 지혜와, 전략적 접근의 필요성이 요구됨을 의미하고 있다. 통합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어떻게 진행해 나가느냐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교회 공동체 통합은 그 결과가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교회내의 모든 통합교육에 있어서 `장애인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특별한 요구를 가질 수는 있다`라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별한 요구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 자막이나 수화서비스와 같이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장애인의 교회진입이 어렵거나 차단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이러한 교회의 장애인 사역은 개인이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에 공동체로서 접근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만약 이것에 대해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하려 한다면, 장애의 특수성에 대해 다룰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장애인을 도움의 대상으로서만 생각하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장애인 개인의 장애나 특성, 그리고 욕구에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것 보다는 장애인 공동체가 말하는 필요와 욕구에 대해 교회가 부응함으로 어떻게 해야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해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3. 인적, 물적 자원의 확대
장애인 선교와 사역, 그리고 통합사역을 해 나감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교회 안에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신학이나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사람들로 전문 인력이 구성되는 교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훈련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전문가가 있더라도 이들을 고용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확보된 교회는 매우 소수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에 대한 전문가가 교회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장애인전문가를 교회에 배치시키기 위한 과감한 재정 투입이 요구되어야 하지만 7%라는 낮은 수치를 기록하는 한국교회의 사회봉사비 비율이 의미하는 것처럼 교회 내 장애 전문가 채용 자체가 용이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며,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나 사역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 재정문제로 인한 전문인력 부족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전반적으로 봉사의 개념으로서 다가가고 있지만, 교회 내에서 사회복지의 분야가 유급직원을 두는 전문적인 형태로 실행될 필요는 계속해서 대두되어야 한다.
인적 자원의 문제와 함께 해결되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편의시설의 설치와 보조도구의 마련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계단이나 턱이 있어 장애인의 교회 내 진입이 어려운 시설들이 많다. 그렇기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경사로나 장애인 화장실을 만들 필요가 있지만 이는 교회의 많은 재정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교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애인을 배려 한다는 것이기 보다는 한 지체로서의 교회공동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것임에도 그동안 무시되어 온 것이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집는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 예배를 보고, 점자나 자막서비스와 같은 것 하나 마련되지 않는 곳에서 시각과 청각을 잃은 사람들이 과연 예배에 참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문 인력의 부재와 재정의 부족, 그리고 물리적 환경 문제는 장애인들을 위한 교회의 활동을 효과적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인들이 되고 있다. 따라서 장애인의 원활한 교회진입과, 통합을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외적 환경을 정비하여 장애인의 접근성을 높이고, 그들이 교회 내에서 예배나 교육, 그리고 신앙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도록 전문가를 채용하는 등의 재정투자가 과감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만약 개교회로서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면 교단 차원의 지원을 통해 공동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4. 당사자 중심의 프로그램 개발
오늘날의 교회들은 복음전도와,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을 실천 위해 많은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이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동, 청소년, 노인을 겨냥하여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장애인에 대한 프로그램은 매우 적고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장애인을 전도하거나 교회 내 장애인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가 기존의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들에게 편의제공을 할 수 있는 시설이나 전문가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가 빠른 시일 내 공동의 합의를 통해 그들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추고 함께하려는 동행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비 장애 교인의 장애인식에 대한 교육 및 장애 체험 교육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장애아동 부모에 대한 신앙교육, 그리고 부모의 예배참석을 위해 장애자녀가 쉴 수 있는 공간의 운영이 적극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프로그램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된 순서를 진행함에 있어서 장애인이 교회 공동체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통합될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려해야 할 것은 장애인의 욕구나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프로그램은 결국, 전시성만 강조되는 빈껍데기와 같은 것이기에, 계획되어진 모든 순서들이 철저하게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출발되고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구약과 신약성서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이고 징벌적인 의미로 많이 다루었지만, 본질로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차별하거나 구별 짓는 것이 아니라, 장애의 있고 없음과 육체의 강함과 약함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사랑받을 존재임을 나타내는 비유와 상징, 그리고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인식전환이 강력하게 요구되었기에 장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학 정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잘못된 율법 해석으로 비롯된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장애가 생긴 이유를 죄나 벌로써 받아들이게 함으로 장애인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으며, 교회에 새로운 차별의 대상을 두게 만들었다. 또한 장애를 믿음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장애의 당사자와 그 가족들로 하여금 교회공동체에서 소외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갱신될 수 있는 율법에 대한 몰지각으로 인해 벌어진 이러한 장애 이해는 결국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교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몰이해는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회정의나 이웃사랑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교회 공동체가 본인들의 성장만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모습에 사회 곳곳에서 쏟아지는 질타와 함께, 더 이상 선교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의 도래는 교회가 새로운 신학의 정립을 통한 인식변화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과거를 계속해서 답습한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더 이상 성경적이라는 이유로 공동체 안에서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장애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본질적인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신앙공동체의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참고문헌
<서적>
크로스웨이 ESV 스터디 바이블 편찬팀, 『ESV 스터디 바이블』, 부흥과개혁사(2014.05.25.)
<논문>
이은미. “장애인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의 문제점과 대안 모색 연구”, 2013
임준택. “장애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사역-지체장애인을 중심으로”, 2002
<기사>
오요셉, “한국교회, 일반사회보다 뒤처진 장애인 인식.. 장애인의 친구 되야”<CBS노컷뉴스>
2021.10.24. https://www.nocutnews.co.kr/news/5539113?page=1
박요셉, “숱한 반대에도 장애인 목사가 목회하는 이유”<NEWS&JOY>
2021. 10. 24.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27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