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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구원론 본문

신학

웨슬리의 구원론

유기농막대사탕 2023. 9. 1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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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웨슬리의 구원 이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종교개혁적 전통에 분명하게 서 있으면서 서방신학의 구원이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칭의`를 넘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동방신학의 구원론과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웨슬리의 구원론은 서방 신학과 동방신학을 아우르면서 구원은 순간적이면서도 기나긴 순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면서도 우리가 완성 시켜야 하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웨슬리의 구원론을 집약하여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새로운 창조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구원론은 선행은총-칭의/신생-선화-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기나긴 여정이고 순례이. 이렇듯 웨슬리의 구원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과 구원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다음에서는 그가 구원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어서 선행은총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긴 과정을 알아보며 웨슬리의 구원론을 그려보려고 한다.

 

I. 하나님의 형상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 세 가지로 분류하여 이해한다.

 

1) 자연적 형상

자연적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으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성, 의지, 자유는 자연적 형상에 속한다. 웨슬리는 타락 이전의 이성과 타락 이후의 이성을 구분하며, 타락 이전에 인간의 이성은 직관적으로 진리를 식별할 수 있었다. 이것의 증거로서 웨슬리는 아담이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지은 것에서 찾아낸다. 아담은 동물들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식별하여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직관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없고 감각적인 자료에 의지하여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의지와 자유도 자연적 형상에 속하며,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함께 더불어 간다. 웨슬리는 에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부패 되었음을 인정하고, 타락 이후부터 인간의 의지는 죄악의 힘에 포로가 되어 버렸다.

 

만약에 타락으로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자유를 전제한다. 단순한 기계나 돌은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듯이 자유하지 않은 사람은 수동적인 존재이므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자유의지는 초자연적인 것으로서 타락한 피조물을 책임적인 존재로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자유는 양심에 민감성을 그리고 의지에는 선을 택하고 악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결국 이성, 의지, 자유는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반영하기 위하여 주어진 선물이다. 이 선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면 풍성해지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어지면 왜곡된다.

 

2) 정치적 형상

정치적 형상은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인간에 부여된 능력들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정치적 형상을 지닌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청지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동물들도 자연적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치적 형상은 창조주와 다른 피조물 사이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특별한 책임으로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을 통하여 다른 피조물들에게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인간의 행동 중에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반사될 때 인간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3) 도덕적 형상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자연적 형상과 정치적 형상에 비하여 세 번째 도덕적 형상을 가장 손상받기 쉬운 것으로 본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인 거룩함, 사랑, 정의 등을 닮은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사랑이 충만하였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과 사고와 언어와 행동의 유일한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자비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며, 인간은 이러한 창조주의 솜씨에 의해 창조된 그러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도덕적 형상은 파괴되어 악마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다. 도덕적 형상도 우리가 소유한 그 어떤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창조주로부터 받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창조주에게 순종함으로써 드러내고 중재해야 한다.

 

II. 구원의 여정

 

1) 선행적 은혜

웨슬리의 구원의 여정에서 그 무엇보다 제일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은 선행적 은혜로 시작한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죄를 회개함으로 칭의와 신생의 상태에 들어가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우선적으로 선행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선행적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의 우선성을 의미한다. 선행적 은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중에서 일부 제한된 사람에게만 임하는 제한된 은혜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은혜로서 보편적인 은혜이다.

 

웨슬리에 따르면, 사람이 자기의 범죄에 대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어느 정도의 깨달음이 있다든가 혹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생긴다면 이것은 선행적 은혜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선행적 은혜는 양심과 연결된다. 웨슬리는 또렷하게 주장한다. “양심이란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선행적 은총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많건 적건 이 선행은총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웨슬리는 양심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사람은 은총이 없어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는 까닭에 범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의하여 구원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 선행은총이라 함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인데 우리가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점점 증가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하시는 빛 곧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지시하시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선행은총이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해 깨닫게 하시는 것 전부를 말합니다. 이런 것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성령의 역사를 최대한 즉시 억눌러 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또는 부정합니다.

 

2) 칭의와 신생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분을 믿는 죄인에게 이뤄지는 죄책과 형벌에서의 해방을 뜻하며,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신자의 마음속에 형성된 죄의 세력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칭의의 상태에 우리가 들어가기 위하여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있다. 믿음이다. 웨슬리는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믿음보다는 회개가 더 요구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선명하게 말한다. 회개는 필요한 것이지만, 믿음과 동등한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으므로 이론적으로 보아서 회개와 회개의 열매에 소홀하면 의롭다 함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회개와 회개의 열매도 칭의를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십자가 위의 강도는 회개의 열매 없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회개를 많이 하고 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하여도 믿음을 갖기 전에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입는 때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 이다. 더 나아가서 칭의 전에 회개가 있는 것과 같이, 칭의 후에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칭의 이후의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형벌의 두려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칭의 이후의 회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며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생활에 남아 있는 죄, 곧 우리의 말과 행위에 아직도 고착되어 있는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병행된다.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는 일"이라면, 신생은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신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이다. 의와 참된 성결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교만이 겸비로, 거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미움, 시기, 악의가 신실과 온유와 희생적인 사랑으로 변화될 때, 여기에 신생이 있다. 웨슬리는 칭의와 신생을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구분한다. 의롭다 하심(칭의)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신생)이고,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칭의와 신생은 동일한 것을 표시하는 다른 표현으로 칭의와 신생은 동일한 순간에 주어진다. 그러나 칭의와 신생은 쉽게 구별된다. 웨슬리는 칭의와 신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만일 기독교의 전체적인 범위 안에서 어떤 교리든지 '근본적' 이라고 적절히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의 두 가지, 즉 의롭다 하심(칭의)의 교리와 거듭남(신생)의 교리입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for us)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위대한 역사와 관계되며, 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in us)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위대한 역사와 관계됩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본다면,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우선되지 않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은총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고의 순서로 본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처럼 의롭다 하심이 거듭남에 앞서는 것입니다.

 

칭의와 신생은 동일한 것이 아니고, 대단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칭의는단지 관계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신생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칭의는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외적인 관계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한다. 그러나 신생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의 깊은 속이 변화되며, 죄인이었던 우리가 성도가 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호의에, 신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우리를 회복시켜 준다.

 

3) 성화

웨슬리에 따르면, 칭의 단계에서의 얻은 의롭다 함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올바르고 의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화이다. 성화는 우리가 죄악의 권세와 뿌리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회복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화의 완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연결되면서 구원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함(칭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for us) 그 독생자를 통하여 행해 주신 것을 의미하며, 성화는 하나님께서 그 영으로써 우리 속에서(in us) 행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화는 신생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생은 성화로 들어가는 문/통로로서 성화의일부분이지만 그 전체는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우리의 성화, 즉 우리의 내적이고 외적인 성결이 시작된다. 신생이 아기의 탄생이라면, 성화는 그 아기의 성장이다. 어린아이가 순간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여인으로부터 태어나서 후에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점차적으로 서서히 자라나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순간적으로 또는 짧은 시간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되는 것은 점증적인 것이다. 거듭남 (신생)이 성령이 내주하는 은총이라면, 성화는 성령 충만을 체험하는 은총이다. 거듭남이 성령의 내적 증거로 나타나는 은총이라면, 성화는 성령의 외적 증거로 나타나는 열매이다. 거듭남의 순간에 죄 사함을 받았을지라도 죄악성이 남아 있지만, 성화의 과정에서는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죄악성이 죽어가는 성장을 이룬다. 죄의 뿌리, 곧 원죄는 완전한 성화를이를 때 뿌리 뽑힌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웨슬리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영원한 목적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제정하였던 일시적인 수단으로 보면서 사랑의 영광은 믿음의 영광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창조된 순간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 천사들은 믿음을 소유한 적이 없다.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는 믿음이 설 자리가 없었지만 사랑은 설 자리가 있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즉 위대한 사랑의 태양 안에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사랑은 창조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필요하였다. 결국 믿음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창조되었을 때 그 속에 있었던 거룩한 사랑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수단이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세우는 목적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눈으로바라봄으로 믿음이 필요 없게 되고 사랑의 법이 영원히 성취될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속해서 전진하고 거룩한 사랑 안에서 매일매일 성장합시다."

믿음은 영광스럽고 명예스러운 것이지만 계명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에만 이런 명예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고 사랑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믿음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원한 비전 속에서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은 남게 될 것입니다.

 

웨슬리의 구원의 여정에서 성화는 부정적인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을지니고 있다. 부정적인 부분은 죄의 문제로서 줄이고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면, 긍정적인 측면은 사랑의 문제로 무한히 증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으며 무한정 증가될 수 있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죄는부정적인 측면으로 제거되어야 할 요소라면, 사랑은 긍정적인 측면으로 한없이 증가되고 확장되어야 하는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구원의 시작인칭의와 신생은 믿음에 의하여 일어나지만, 성화의 완성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총체이다. 성화의 목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며, 성화의 완성인 전적인 성화는곧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 할 수 있다.

 

4)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는 성화에 대한 대표적인성경 말씀은 빌립보서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2-15) 여기에서 바울의 신앙은정지하는 신앙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는 신앙이다. 성화의 길도 그리스도인이 칭의와 신생에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완전(온전)함을 추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하나님의 완전, 인간적 완전과 신적인 완전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피조물로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동일하게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인간으로서의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방신학의 '신화(神化, deification)도 인간이 신적인 본질로 변화되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본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우리 자신 안에서' 완전한 존재로 이해될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것을 회복해야 할 관계 안에서 완전한 것이다.” 웨슬리는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웨슬리 자신의 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가능한 것이며,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면 그릇된 기질, 욕망, 충동이 사라지고 사랑이 전적으로 그를 소유하게 한다. 자연적 욕망의 부패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이기적 관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생활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인도한다. 웨슬리는 완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전]은 성경에서 거룩이라고 부르는 영혼의 습성적 성향 바로 그것으로서 그것 이상도 그것 이하도 아니다. 완전은 죄로부터 깨끗하게 된 존재 영육 간에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존재를 묵시하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었던 미덕을 부여받은 존재, “우리 정신이 아주 새로워져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려는 존재를의미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 번째로, 완전은 의도의 단순성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런연에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에서 웨슬리의 관심은 주로 의도의 완전즉, 초점이 분명하고 순수하게 하는 헌신과 확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의 신학에서 의도의 단순성은 초기에서 후기까지 연속적으로 흐르는개념으로 우리의 의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단순하여지며, 하나님의 영광과의지에 집중하고 우리의 의도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같이 대답한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위배되는 그릇된 기질이 조금도 그 영혼에 남아있지 않고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의미한다.”

 

두 번째로 완전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서 예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우리를 걷게 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완전에 대한 처음 생각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요,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 이었으며,그가 품으셨던 마음 전체를 품는 항상 그가 행 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의 단순성과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분리되지 않는다.“마음에 순수한 의도를 품고,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꾸준히 염두에 두십시오. 그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가 품었던 그 마음을 우리가 품어, 우리 마음이 모든 움직임과 우리 혀의 모든 말과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관계된 것 외에는 그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세 번째로 완전은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1759년 연회 후에 발행되어진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위배되는 그릇된 기질이 조금도 그 영혼에 남아 있지 않고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는 웨슬리의 설명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마음을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영혼과 몸과 본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그분과 함께 걷도록 하는 것이며, 자기를 내어주는 그 정신을 나누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정신에 있어서 한정되어 있다. 완전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 과오를 범하게 된다.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지로 인하여 죄를 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절대적 완전이란 이 땅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완전이란 계속적인 증가를 불허하는 완전이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절대적 완전이란 이 땅 위에서는 없는 것을 압니다. 정도의 완전이란 없습니다. 즉 계속적인 증가를 불허하는 정도의 완전은 없는 것이다.” 결국 웨슬리는 상대적 완전과 절대적 완전을 구별하면서 절대적 완전은 죽음 후에 영화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완전에 도달하여도 의식적인 죄는 범하지 않을 수 있지만 무의식적인 죄의 가능성은 남아 있고, 무지, 실수, 유혹, 연약의 상태는 남아 있기 때문에 지상에 실현 가능한 완전은 절대적 완전이 아니고 상대적 완전이다.

 

나가는 말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슬로건 속에 구원은 곧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신앙이 숨겨져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하여 예수를 믿고, 예수는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게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였는가? 설령 내가 지옥에 간다고 하여도 예수는 나우리의 그리스도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구원을 천국에 가는 것과 동일시한다면, 구원은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와 동일시되어질수 있다. 이러한 구원이해는 '구원파의 구원이해로 이어질 위험성을 지니고있으며, 율법무용론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 (cheap grace)로 변질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웨슬리와 같이 순간적으로 주어지면서도 선행적 은혜 칭의/신생성화-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으로 이해한다면, 구원은 순간적인 것이면서 계속적으로 완성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전제조건은 믿음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단순히 믿음 그 자체만을 강조하지 않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은 믿음 그 자체에 머무르지않고, 사랑으로 접속되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할 수 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사랑을 증가/확대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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