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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구원론 본문
어거스틴의 구원론
우리가 배우는 신학 이론의 대부분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 기원을 둘 정도로,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고대 기독교 사상의 완성자일 뿐만 아니라, 후세대를 위한 기독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인물이며, 전통과 시대의 변화를 창조적으로 종합한 신학자였다. 이렇듯 훌륭한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였기에 그가 펼친 구원론에 대한 고려 역시 죄론, 은총론, 예정론, 기독론을 망라하며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에 다음에서는 그중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가 주장하는 구원론의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인간 이해
1) 타락 이전
어거스틴은 타락 이전의 인간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라고 이해한다. 아담은 원래의 완전함과 의로운 상태에서 창조되었고 그의 의지는 선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의지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담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다. 즉, 첫 사람의 본성은 흠이 없고 또한 아무런 죄도 없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2) 타락 이후
어거스틴이 보기에 인간을 타락시킨 의지 남용의 출발은 교만이었다. 그는 교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교만은 잘못된 군림을 희구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잘못된 군림이란 마음이 근본을 두어야 할 그분을 버리고 자신에게 근본을 두는 것을 말한다.” 교만에 의해서 자신에게 도취 된 인간은 자기 외에는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고, 이에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비참할 정도로 훼손되었고, 그것이 자손들에게 유전되어 죄와 사망에 종속되게 하였다.
2. 은혜와 자유의지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부인하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도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를 누리고 있고, 그 자유로운 선택권이 인간을 책임 있는 행동자로 인식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인간은 그 선택권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유 의지를 죄의 결박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자유의 원천은 인간 밖에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스스로의 공로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오직 은총에 의해서만이 주어지고 하나님께 복종할 때 인간은 자유롭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선한 것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은혜와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발생되고 인간의 선한 의지도 하나님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에 의해 동기 유발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촉발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은혜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을 확실히 하고자 함이다. 펠라기우스와는 다르게 어거스틴에 있어서 은혜는 외적인 도우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비밀스럽고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은혜를 사실상 성령의 임재로 이해하고 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향한 단순한 호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그들의 영혼에 주입하는 권세나 은사를 말한다.
즉, 어거스틴에 있어 은혜는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선행적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로 하여금 선을 바라고 추구하도록 이끄신다. 이때 실패하지 않도록 철저히 인도하시면서도 결코,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런 다음, 협동적 은혜로 우리의 의지에 역사하신다. 즉 선행적 은혜로 불을 지피시고 협동적 은혜로 북돋우신다. 다음 단계의 은혜로 충분한 은혜와 유효한 은혜가 있다. 충분한 은혜란 이 은혜를 수납하여 역사하도록 한다면 구원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유효한 은혜란 택함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은사이다. 어떤 신앙의 움직임도 은혜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3. 원죄와 세례
어거스틴은 죄의 심각성과 악마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전적 체험은 그의 신학적 요소 가운데 심리학적 설명이 중요한 해석의 틀로 등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원죄론 이해에도 역시 심리학적 해석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죄의 실체를 자전적 체험을 통해 욕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죄의 유전에도 긴밀하게 작용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뿐만 아니라 당시 고대 사상에서도 인류의 불행 이면에 죄가 작용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재를 성경과 교부들의 사상, 그리고 교회의 전통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특히 초대 교회의 유아 세례 관습을 주목하면서 이는 순진무구해 보이는 유아들도 원죄로 인해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제한 것이라고 말한다. 원죄의 유전은 성교 시 나타나는 육체적 흥분을 수반하는 신체적 출산 행동으로 자손에게 유전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세례란 바로 이런 죄책을 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어거스틴이 세례 안에서 본 구원의 기능은 단지 죄를 씻어주는 기능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구원에 대한 인간 측의 적극적인 참여를 가능케 해주는 기능까지도 포함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성인이든 유아든 구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례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세례에 대한 이해는 죄 씻음 외에도 성령의 역사로 인한 적극적인 성화의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세례를 통해 주어진 은혜는 사람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는데 이것이 곧 사랑의 주입을 의미한다. 즉, 세상을 향해 있던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인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4. 믿음과 사랑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강조하고 인간 편의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조건으로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은 사랑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소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이론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믿음은 결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이 곧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 펠라기우스에게 맞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성을 강하게 주장하게끔 만들었던 내용이었다. 인간이 타락 후 선을 행할 의지가 무력하게 됨으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면 동시에 인간 편에서는 의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발휘되고 이는 나아가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데 공동 협력자처럼 된다고 생각했다.
5. 예정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중에 더욱 구체화된 그의 사상의 단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 그리고 이 의지가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에 따라 창조 이후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어떤 사람은 영원한 영광으로 다른 어떤 사람들은 유기로 예정되어 있기에 인간의 어떤 공로나 행위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어긋나게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구원의 이유는 인간의 어떤 요소도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뿐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중 예정론은 우선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강력한 확신의 결과였다. 따라서 이중예정 자체를 언급하기 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확고한 예정을, 그리고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의 수여를 강조하고 그 결과로 이중 예정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멸망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만이 누가 구원받을지를 정하신다. 특히 구원받기로 정한 수는 영원히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으로써,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정론의 주장은 불공평성에 대한 비난을 야기할 수 있지만,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죽을 운명임을 강조하며 그나마 얼마의 수를 구원하신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한다. 구원을 위해 선택된 자들에게는 견인의 은혜와 결코 멸망 당할 수 없는 구원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우리는 앞서 몇 가지 주제를 통해 어거스틴의 구원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어거스틴의 구원론의 특징은, 원죄에 대해 강조한다는 것과 인간에 대한 비관적 견해로부터 은총론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은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구원은 하나님의 견인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예정론 또한 이러한 구원론의 논리적인 결과다.
그의 구원론은 성경에 기초한 진리로써 제시되었다. 그는 성경을 그가 내리는 모든 판단의 근거로써 삼았고, 이는 그가 구원의 체계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 언제나 확신에 설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모든 시작을 하나님의 은혜에 두는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오늘날 세상에 집중하며 도덕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비록 그의 구원론에는 몇 가지 논란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참된 구원의 의미를 부여함으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참고문헌>
오성욱, “사중복음 중생론”, 『사중복음 교의학 서설』, 글로벌사중복음 연구소 편, 101-137,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18
한국조직신학회(2019), 『구원론』, 대한기독교서회, pp. 45~68/125~156
박영실, <어거스틴의 구원과 성화>(2007)
김광선, <어거스틴의 구원론, The Soteriology of Augustine>(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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