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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신학 본문

신학

존 웨슬리 신학

유기농막대사탕 2023. 9. 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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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웨슬리 신학의 특징

 

웨슬리 신학의 특징은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는 사변적인 신학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구원을 문제로 두는 실험적이고도 실천적인 신학이라는 데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웨슬리의 `기독자 완전`인데, 그는 여기서 그가 지향하는 바가 실제적인 신앙 체험과 더불어 이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변화, 그리고 설교와 선교를 목표로 한 신학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웨슬리가 하고자 했던 신학이 경험에 의하지 않은 변증적인 교리의 이해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신자가 신앙을 통해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하는 살아있는 신학임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신학을 철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성경에서 찾아 경험에서 확인하는 것으로서 신학을 전개한다. 신학은 형이상학적인 방법을 통해 존재를 추리해 나가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계시 사건을 좇아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웨슬리는 신학이 기독교적인 삶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선포와 밀접히 관계되고 있다고 보았다. 신학은 진정한 삶과 말씀의 선포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개인의 삶을 포함해 사회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갱신과 성화`를 목적으로 한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하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웨슬리는 이웃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웨슬리의 신학과 실천은 웨슬리의 사변형이라 불리는 네 개의 신학적 지침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1. 성서

웨슬리보다 성경의 근본적 주제에 집중했던 신학자는 없다. 웨슬리는 계몽주의에 물들었던 영국 기독교가 `성경적 기독교`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복음의 핵심인 구원이 `성경적 구원`에 있음을 강조함과 동시에 신도들이 `성경적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길 바랐다. 그래서인지 그의 설교의 문단들은 성경의 인용으로 빼곡하였는데, 인용부호가 없는 내용조차 성경에서 나온 단어이고 문장이었다. 웨슬리는 성경의 참과 거짓을 스스로가 세운 기준을 통해 나누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성경을 통한 기준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성경에 대한 우위성은 교리적인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실재가 웨슬리의 생각과 경험의 방법을 결정한다.

 

웨슬리는 분명하게 성경에서 시작하며 상황을 기술해 나간다. 그러나 웨슬리는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신도들에게 생동하는 신앙을 언급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한다. 그는 성경을 행동을 위한 가르침이나 분부로서 삼지 않는다. 웨슬리에게 있어 성경의 교리는 일 방향적으로 삶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삶의 체험으로서 확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웨슬리는 성경을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신학의 논리된 것으로 이해하면서도 폐쇄적인 규범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서는 신학의 근거였다. 그는 일기에서 말하기를 `나의 근거는 성서이다. 그렇다. 나는 성서 고집쟁이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큰일이든 잔은 일이든, 성서를 따른다`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웨슬리는 스스로가 모든 면에 있어서 성서적이고도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성서야말로 참 지혜를 줄 뿐 아니라 그를 확인하고 더하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전통

웨슬리가 1765년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말했듯이 웨슬리는 일찍이 1730년부터 `한 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기에 성서 이외에 다른 책에는 그리 집중하지 않았다. 다시 1789년에 기록하기를 `나는 어린아이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사랑하고 존경하도록 배웠다`라고 했으며, 그다음으로는 교부들의 글과 고대 3세기의 저서들 그리고 영국교회를 존중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웨슬리가 `한 책의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성서 외에 다른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웨슬리는 고대로부터 그 시대에 이르는 신학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웨슬리는 특히 2세기의 교부들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그리스 신학자들을 좋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치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웨슬리는 과거의 위대한 스승들이 경험하고 생각하며 행한 것으로서 그의 신학을 교정해 나갔다. 그러나 웨슬리가 과거에 활동했던 인물이나 교회의 격식에 대해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다루었던 주제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고를 보여주며 그에 대한 반성을 이어 나간다. 웨슬리가 생각한 전통의 권위는 기독교적인 사고를 통해 삶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에 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를 방해하는 인물과 저작, 신조와 고백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제외되거나 비판되었다.

 

3. 이성

이성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이성으로 하라. 철저하게 이성을 적용시켜라. 그리고 동시에 신앙, 사랑과 희망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이성이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게 하라. 그리고 결국 참된 가치나 본질적인 행복을 산출하지 못함을 시인하라.“

 

웨슬리는 이와 같은 말을 통해 그리스도인 됨이 자세하고 확실한 믿음의 체계를 갖춤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웨슬리는 이성이 가지는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오류와 죄라는 결과가 이성이 계시의 독립적인 원천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만을 이용한 신학은 성립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덕을 생산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선행 은총으로 인해 이성은 신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성은 성경을 해석하는 길잡이며 신학적 이념이 표현되는 개념적 도구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참된 종교는 직접적인 성령의 사역으로서 생동하는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성령의 사역은 이성을 통해 이해하거나, 관념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이성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이신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성을 경시하는 광신주의를 거부하기도 한다. 기독교가 이성을 포기한다면 기독교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본래적 능력인 이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높이는 것이다. 종교는 이성을 지향하고 그것을 높임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체험

웨슬리에게 있어 체험은 마음이 울렁이는 감정을 넘어 진실로 현재하며 실제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다리로의 역할을 한다. 체험은 웨슬리의 신학 전개에 있어 단순히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근본이 되는 자료를 제공한다. 성경과 교리는 그 처음과 끝이 경험을 통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체험 이후, 성경을 확증하는데 있어 경험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경험적 검증은 성경과 이성의 일치보다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와 같은 믿음을 얻기까지 성경의 진리는 추상적이면서 가설적인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확신이 웨슬리가 보는 체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경험은 기독교의 진리로서 정의되는 것들에, 새로운 것을 덧붙여 편집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 전통이 이어지는 기간 동안 많은 신학자가 경험을 경계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들이 감사하고 지각하고 즐겼던 심미적 체험을 종교적 진리와 혼동한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신앙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있어 경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마음에 힘을 불어넣어 신자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경험적으로 말하고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말씀을 수정하지 않으면서도 경험을 추가하는 것으로 그것은 생명력을 얻게 되어 살아있는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프랑크 베이커의 주장대로 웨슬리의 경험은 사물에 대한 개인의 감각적 느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객관적 실재를 분석한 것이다. 웨슬리의 관심은 성령이 직접적인 역사로서 어떤 신앙의 체계에 대한 확신을 준다는 것보다 일정한 기간에 걸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혹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교리의 참됨이 증명된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교리적 결심을 위해 평가한 경험은 삶을 통해 얻어낸 지혜와 같은 것이지 객관적인 정보나 지식 같은 것이 아니다.

 

나가는 말

 

이렇듯 우리는 웨슬리의 사중 규범에 대해 살펴봄으로 그의 신학에 어떠한 특별함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사중 규범 중에서도 웨슬리가 그의 방법론을 체계화하는 데 특히 도움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체험이다. 웨슬리는 신앙을 가짐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지식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교리적 승인이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선행 이전에 일어나야 할 실재적 사건, 곧 성령이 운행하심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경험을 포함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웨슬리는 정통 교리보다 정통 행위에 우선성을 두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의 신학은 실천적이다. 그의 신학적 특징은 기독교가 무엇인지와 함께 기독교적인 삶이 무엇인지 알림으로, 듣는이들이 기독교적 경험을 통해 신실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신학`이라는 데 있다. 러년이 확언하는 것처럼 웨슬리안 전통이 오늘날의 신학에 공헌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에서 경험의 정당한 역할을 터 닦았다는 것이며, 이로써 신학의 정당성을 생활세계 안에서 확보했다는 점이다.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경험은 항상 누군가로부터 설명되어 진 경험으로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학은 현시대의 그릇된 경험을 말씀을 통해 깨달아 바로 세우려 노력하는 실천신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신학을 웨슬리를 통해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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