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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적 사회와 성경적 리더십 본문
들어가는 말
경제협력개발기구가 2020년 6월에 발표한 경제성장률 지표에서 한국이 1위를 차지하였고, 이에 더해 정부는 고용률이 증가하고 취업자 수 감소 폭이 줄어들고 있으며, 집값 상승세가 잡혀가고 있는 중이라 발표 하였다. 이러한 상황만 놓고 보게 되면 우리나라의 경제가 안정세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통계에 의한 것으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집값으로 예를 들어보면, 정부는 전국 주택을 기준으로, 한 통계를 언급하며 주택시장이 안정화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든 주택 형태에 대한 한국의 주택 값은 부동산이 폭등하던 어느 시기에서도 안정된 형세를 보였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우리나라 인구의 반 정도가 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서울과 수도권아파트의 가격이 이토록 가파르게 오르는 와중에 전국 주택 시장이 안정화되고 있다는 말은 수도권 이외의 주택들의 가격이 동결되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말로도 이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택시장의 안정화를 말하는 이러한 통계는 양극화가 점점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기에 국민들은 정부와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통계로 조작과 같은 말장난을 한다며 경질하기 까지 하는 것이다. 차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져 가는 이러한 상황은 주거뿐만 아니라 지역, 기업, 고용, 교육에 까지 그 세를 넓혀가고 있으며, 이러한 양극화는 지속적으로 불평등과 상대적 박탈감을 야기하고 있다. 또한,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소득의 격차는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되게 하고 있음도 보게 된다.
수준의 차이가 많고 적음이라는 두 방향을 향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는 이러한 현상은 여러 분야에서 사회 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과 동시에,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양산하고 있다.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수준의 리더십이 요구되어 지기에 성경이 그리는 모습들을 참고하여 양극화로 고통 받는 오늘날의 사회 모습에 적용할 수 있는 리더십이 어떠한 것이 있을지 알아보려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양극화
다음에서는 사회적 모순들과 그로인해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구약과 신약의 관점을 나누어 살펴본 뒤, 각각의 시대의 환경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약 성서적 관점
구약성서는 가난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다룸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계약법전인 출애굽기 21장부터 23장에 걸쳐 나타나는 주인과 종의문제, 폭행, 소유와 배상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이방인과 과부 그리고 고아의 문제, 안식년과 안식일의 문제 등을 다루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규약들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출애굽기 21장 전반부에 나타나는 노예법은 여섯 해 동안 섬인 히브리 노예가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수 있게 하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출 21:2) 당시 히브리 노예는 신분이 낮은 국외자로서 사회에서 불리한 환경에 놓여있는 이들이었기에 이러한 노예법의 존재는 성별에 관계없이 노예 된 자들에 대한 한계 없는 유린을 방지하여 주었다.
출애굽기 22장 말미부터 23장 전반부까지는 이방인과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을 말함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자하는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계약법전은 먼저 이방인들을 압제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당시 이방인들은 타향살이를 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임과 동시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는 그들을 고아나 과부와 같이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신명기에서 그들을 억압하거나 학대하는 것을 죄악시 하였고, 재판에서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신 1:16)
출애굽기 22장 말미를 살펴보게 되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고 그것의 주된 내용이 채무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연민법에 대한 내용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줄 경우, 담보 설정에 관한 일반적인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돈을 빌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고 보증을 위한 담보를 지불해야 했는데, 채무상환 중 가장이 죽으면 자녀들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는 등 `채무`라는 상황으로 인해 생기는 종속관계가 사회의 여러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기에 연민법을 제정하여 그들을 보호하려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그들의 노력은 출애굽기 23장에서 나오는 안식일과 안식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애굽기는 여섯 해 동안은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 가난한 이들과 들짐승이 먹게 하라 말한다.(출 23:10-12) 안식년은 위에서 살펴본 종살이하던 노예가 해방되고 부채가 탕감되는 해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모습은 땅의 주인인 하나님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는 연합에 참여하려는 이스라엘을 볼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은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한 가난한 이들과 같은 약자들을 향해서도 그 선하심을 표현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신앙은 계약법전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규정하여 그들의 율법을 구성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지 않고, 학대하지 않으며, 무리한 채무를 지우지 않는 등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결국, 구약성경은 돈이 없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이 가난할수록 더욱 궁핍해 질 수 밖에 없는 이들을 향해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적 정책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1-1)아모스
주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서 활동한 남유다의 드고아 출신인 아모스, 우리에게 공의를 선포한 자로 잘 알려져 있는 그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세상적인 힘의 논리를 거스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선포했다. 아모스 1장을 살펴보면 그가 이스라엘에 이웃한 7개의 작은 민족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당시 이스라엘에 이웃한 일곱 나라는 모두 앗수르의 애굽 압박으로 인해 위험한 처해 있었는데, 아모스는 선포를 통해 그들에게 닥칠 일들이 앗수르가 아니라 온 땅의 창조주인 여호와에게서 비롯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방나라 뿐만 아니라 2장에서 이어지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모습은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은 단지 유대인만 위한 것이거나 신약의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또한, 그 형태가 사람이든지 나라이든지 간에 죄를 물으시고,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기준에 대해 그 기준이 기록된 형태로 존재하던지 아니면 단지 마음 속에만 가지고 있는 것이던지 간에 상관치 않고 책임을 물으신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모스의 선포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힘과 기준도 하나님 보다 클 순 없으며, 그의 행하심을 또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 그는 돈의 노예가 되어가는 이스라엘에 선포한다. 아모스서 8장에서 그가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암 8:4)이라고 꾸짖은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영토의 회복과 경제적 호황으로 인해 모든 것이 돈으로서 통용되는 돈의 맛에 취한 세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확연히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돈을 벌기위해 무엇이든지 하기 시작했는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6)라는 아모스의 지적에서 양극화 현상 또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돈을 벌기위해 가난한 자들을 속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여름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후에 이스라엘을 벌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자면, 속이 썩은 사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치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과일과 같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과 같지만 그 실상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며, 이러한 신앙적인 탈선이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모스가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주저하지 않고 전하는 모습은 선지자로서 당연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활동할 당시 북이스라엘에는 선지자와 제사장 같은 공적인 성직자들이 존재했고, 그 또한 목자와 뽕나무 재배라는 본업이 있었기에 선지자로서 아모스의 등장은 상황적 측면에서 어울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권위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되는 등 죽음의 위협이 그를 휘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부조리에 대해 단호하게 소리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모스의 이러한 외침은 자신을 세우기 위함이 아닌 오직 혼란한 북이스라엘 사회를 하나님 앞으로 되돌려 놓고자 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수많은 부조리들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에 단지 손가락질 당할 것 같다는 이유 때문에, 귀찮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또 성경적이지 못한 교회를 향해 오늘 우리가 서있는 시점에서 정말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2) 사회 양극화에 대한 신약 성서적 통찰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약 1:9-10)와 같이 말하며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해함에 있어 예수의 선포와 맞닿아 있는 것을 보여주는 야고보서에서는 집단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양극화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장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겼으며(약 2:6), 그들을 억압하여 법정으로 끌고 간 자들로서 묘사됨과 동시에 재물을 과시용으로 축적할 정도로 쌓아 두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품꾼의 삯을 주지 않는 등 사치와 방종으로 마음을 살찌게 하는 자로서 표현된다.(약 5:1-6)
이렇듯 빈부의 차이로 발생한 양극화의 현상은 회당에서까지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남루한 옷을 입은 자들은 천대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약 2:2-3)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어 대우하는 이러한 오만방자한 이들에 대해 야고보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약 1:27)이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벌어진 이러한 행태는 신앙과 경건의 부재와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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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는 오늘날 신앙의 지표로 사용되는 주일성수와 십일조, 봉사와 같은 것으로서 경건의 기준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하나님 나라의 동등한 상속자로서의 존중이 필요함과 동시에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 또한 가져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야고보서가 말하고 자하는 것은 돈으로부터 오는 권력과 또 그것으로 얻어지는 명예라는 세대를 관통하는 세상적인 가치 기준을, 경건으로써 얻어지는 새로운 가치들로 대안하여 공동체에 적용하자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신앙은 물론 사회,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 역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2-1) 막달라 마리아
갈릴리 바다 서쪽에 위치하며, 주변지역을 대표하는 행정중심지였던 막달라 출신의 여인이었던 마리아는 누가복음에서 일곱 귀신 들린 자로 처음 등장한다. 성경에는 귀신 들린 자들이 종종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은 일상생활이 불가능 했으며, 기행을 일삼는 자들로서 묘사되는 것을 볼 때,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그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스라엘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경 속 예언들과 율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감사함 때문에 따라다녔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극히 낮은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이를 살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며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예수가 잡히던 날 모든 이들이 도망가고 떠나버린 상황에서도, 그리고 이후 수모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든 상황에서도 그녀가 충실한 종으로서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했으며, 이를 통해 부활하신 주를 처음으로 만나는 상을 얻게 된다.
오늘날과 달리 1세기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는 약자와 같았다. 이에 더해 그녀가 가지고 있던 꼬리표는 그녀의 위치를 더욱 낮추었을 뿐 높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을 때 제자들 중 그 누구도 그녀의 증거를 믿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와 같은 모습은 그녀가 사회적 약자에 속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닥친 무수한 사회적 부조리와 맞서 진리위에 서있기를 원했기에 예수라는 의를 끝까지 좇은 사도중의 사도였음을 깨닫게 한다.
최근 들어 막달라 마리아의 사도성을 두고 여기저기서 언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녀는 중세 남성중심의 교회가 씌운 창녀의 프레임 희생당한 인물이며, 실상은 초기교회의 주도권을 놓고 베드로와 경쟁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십자가의 증언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를 선포할 사명을 직접 위임받았기 때문에 그녀는 사도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녀의 정보가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예수의 사역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은 여성의 권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모순에 당당히 맞선 용기 있는 것이었으며, 이는 오늘날에 사회를 비롯해 교계 내에까지 등장하는 젠더 갈등에 대해 성별에 관계없이 자질이 있다면 남녀 모두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나가는 말 (화천대유, 오징어게임)
요즈음 화천대유 사건으로 인해 나라가 떠들썩하다. 2015년 성남시 산하에 `성남의 뜰`이라는 대장동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목적법인 화천대유와 자회사인 천화동인에 총 4,040억 원의 배당수익이 발생했고 여기에 여러 인사가 관련되었다는 것이다. 사회, 경제적 성공의 욕구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한순간에 벌어들였다는 이러한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으며, 가뜩이나 코로나시대에 많은 타격을 입은 자영업자들에게는 좌절을 안긴 것 같이 보인다.
사회, 경제, 문화, 성별의 격차와 더불어 정보까지 그 차이를 벌려가는 시대와 더불어, 계속해서 증가하는 청년층 자살률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오징어게임처럼 못 버티면 죽게 되는 서바이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다수결이라는 민주사회의 의사결정 장치로 게임을 중단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임이 본인을 헤칠 수도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희망이 없는 바깥 사회의 상황은 각각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심과 탐욕으로 하여금 이성을 마비시키게 했고, 결국 모두가 최후의 1인을 꿈꾸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경제의 차이는 나눔을 만들어내지 않고, 문화의 차이는 수용을 만들어 내지 않는 등 자본주의로부터 야기되어 지독하게 퍼지고 있는 이러한 사회 병리적 현상은 우리 사회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각박하고 극단적인 사회로서 변해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종교가 가지는 가치가 커져감에 따라 교회에 대한 사회적 기대 또한 커져가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에 합당한 영성과 리더십을 갖출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우리의 현실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상생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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