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_castle
반달족에 대하여 본문
1. 반달족이란?
반달족은 오늘날 폴란드 남부 지역에서 거주했던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로, 게르만족 대이동 때 고트족과 비견될 만큼 장거리로 이동했다. 그들은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곡창지대였던 카르타고 지역을 점령하여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반달족의 어원에는 여러 학설이 있다. 떠돌다 라는 뜻을 가진 `wand-`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과 스웨덴의 지명인 벤델(Vendel)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관점, 또한 게르만족의 전설적인 영웅인 아우르반딜(Aurvandil)을 선조로 받아들여 반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학설 등이 있다.
반달족은 실링기(Sillingi)와 하스딩기(Hasdingi)라는 두 집단으로 나뉜다. 실링기 부족은 슐레지엔 지방에서 살아갔으며, 로마를 침공하고 대 이주를 감행하는 반달족은 하스딩기 족이다.
2. 게르만족의 대이동
민족 대이동이라고도 불리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4세기 말 훈족의 서진에 자극을 받은 게르만 계의 여러 부족이 대규모로 로마제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하고,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제국 각지에 정착하면서 여러 부족 왕국을 건설하는 6세기 말까지의 200여 년 동안의 과정을 가리킨다.
이때 반달족도 여느 게르만 민족처럼 이동하게 되는데, 이들이 로마로 칼을 겨눈 것은 로마가 아틸라의 훈족과 싸울 때였다. 그들은 왕 고디기젤의 지도 아래에서, 동맹국인 수비에족과 사마르트 계열인 알란족과 함께 갈리아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반달족의 이주는 험난했는데, 406년에 갈리아 방향에서 매복 중인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아 고디기젤을 포함한 20,000여 명의 반달족이 전사한다. 그러나 동맹국인 알란족의 도움으로 반달족은 라인강의 프랑크족을 격퇴하였으며, 그해 겨울 고디기젤의 아들인 군데릭의 지도 아래에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고 갈리아를 남하하며 황폐화시키면서 갈리아의 남서부 지방인 아키타니아까지 밀려간다.
3. 에스파냐의 반달족
409년 반달족과 그 동맹국들은 피렌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진입한다. 이에 로마는 군데릭에게 포이데라티 지위를 제안하고 아스투리아 지방과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지방을 양도하기로 한다. 알란족은 루시타니아 지방을, 수에비족은 갈라이키아 지방을 일부 양도받았으나, 알란족은 418년 서고트족과의 격돌에서 왕이 살해되자 군데릭에게 알란족의 왕위를 넘기게 되고 이로써 군데릭은 반달족과 알란족의 왕이라는 직위를 획득하게 된다.
422년 군데릭은 이베리아 남부가 아닌 새로운 땅으로의 정착을 원했고, 결국 그는 아프리카로 가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 로마와 싸우기도 하지만, 서고트족과의 전쟁이 주를 이루었기에 후계자인 가이세리크에게 뒤를 맡기며 428년에 사망한다.
4. 북아프리카 반달왕국
429년 군데릭의 동생이자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가이세리크는 에스파냐를 포기하고 부를 안겨줄 새로운 땅을 찾기로 결정하고, 함대를 조직하여 8만여 명의 부족을 이끌고 대서양과 지중해를 경계 짓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를 침공한다.
430년, 이들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 성을 포위하고 14개월에 걸쳐 공성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북아프리카교회의 지도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도 이에 대항해 농성했지만, 함락 직전, 질병과 기아로 고통받는 시민들을 돌보다 열병에 걸려 죽게 되고, 성 역시 함락되어 카르타고로 이주할 때까지 반달족의 수도가 된다.
435년, 로마와 반달족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가이세리크는 439년에 평화조약을 끊고 카르타고로 침략을 개시한다. 카르타고를 점령한 가이세리크는 히포 레기우스의 반달족 대부분을 카르타고로 이주시켰고, 그곳을 반달 스타일로 바꾸기 시작한다.
카르타고를 점령한 가이세리크는 지속적으로 로마를 침공하였고,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하며 반달왕국을 지중해의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시킨다. 이때, 로마는 그동안 훈족의 침입에 전념하고 있었고 훈족의 왕이었던 아틸라가 죽고 나서야 부랴부랴 반달족에 대한 대책을 세웠지만, 그들을 막을 수 없었기에 442년, 서로마제국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딸과 가이세리크의 아들을 결혼시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그를 죽이고 황제가 되면서 양측의 교섭은 깨지게 되는데, 이는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우스 3세의 딸을 자기의 아들과 결혼시킴으로,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손쉽게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가이세리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발단이었다.
결국, 가이세리크는 평화조약을 파기하면서 대대적인 로마의 약탈을 개시하게 되는데, 이때, 로마에 상륙한 반달족에게 교황 레오1세가 긴급하게 제의하여 역사적인 옛 도시와 교회들을 파괴하지 않으며, 저항하지 않는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협의를 맺고 길을 열었다. 이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가 군을 이끌고 대항하였지만,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성난 로마 군중들에게 그가 살해당하게 되면서 반달족이 로마 시내로 진입하게 된다.
410년에 서고트족의 알라릭에 의해 약탈이 진행된 뒤 35년 만에 재현된 또 다른 게르만족에 의한 로마의 약탈은 로마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학자들은 이 사건을 로마몰락의 현실적인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5. 반달왕국의 몰락
반달왕국은 다른 인종과 융합하던 다른 게르만족과는 달리 로마 가톨릭과 아프리카에 살던 원주민이었던 베르베르인들을 탄압했는데, 이러한 정책은 동로마제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 이전에 일곱 번째 왕이었던 힐데리크는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지만, 사촌이었던 겔리마르가 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뒤, 다시금 가톨릭을 탄압하자 심기가 불편해진 비잔티움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로마의 명장 벨리사리우스에게 반달족을 정벌하게 한다. 이에 겔리마르는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하게 되면서 반달왕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6. 반달리즘
반달리즘은 5세기 초 유럽의 민족 대이동 때 아프리카에 왕국을 세운 반달족이 지중해 연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지역까지 약탈과 파괴를 거듭한 민족이라고 알려진 데에서 유래된 프랑스 말로, 문화, 예술 및 공공의 재산이나 사유 재산을 고의적으로 파괴하거나 해를 끼치는 행위를 말한다.
반달리즘이라는 언급했듯이 고대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에서 비롯되었다. 폴란드 남쪽에서 남하하여 반달왕국을 세운 이들은 455년에 로마를 침공한다. 반달족은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된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고 있어서 로마 가톨릭과는 대립하고 있었다. 중세 기독교 교리체계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로 있을 때 반달족의 침공을 직접 겪었는데, 이 일은 반달족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로마를 침공한 반달족은 문화 파괴자이자 약탈자로 인식되었고, 고대 로마의 문화를 이상화했던 르네상스 이후 이러한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파괴와 약탈 행위가 유독 심하게 자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달족은 중세 이후 고대 로마 문명을 파괴하고 약탈한 자들로 여겨졌다. 반달리즘이라는 용어는 1794년 프랑스 블루아의 주교인 투르 앙리 그레구아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군중들이 가톨릭교회의 건축물과 예술품을 파괴한 행위를 반달족의 로마 침략에 비유하면서 반달리즘이라고 불렀으며, 이 말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반달리즘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7. 반달왕국의 종교정책
429년 북아프리카를 침공한 이래 아리안주의를 주로 추종했던 반달족은 니케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이 박해는 침공기간 동안 교회에 가해진 폭력으로 시작되어 반달왕국의 합법화로 인해 일관된 종교정책으로의 색채를 가지게 되었다. 반달 왕의 아리안 교회를 발전시키고 니케아의 관행을 억압하기 위한 노력은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카르타고의 많은 성직자가 아프리카에서 추방되어 반달왕국 내의 니케아 주교의 총수가 감소했으며, 평신도는 공직에서 제외되었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의 박해는 정치적 동기를 가졌기에 행해졌다. 가이세리크는 아리안주의를 그의 추종자들을 단결시키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니케아인들과 상호작용할 때마다 이러한 전략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이세리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훈네리크는 니케아 교회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으며, 아리안주의를 북아프리카의 주요 종교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의 재임 시절 동안에 사제들이 전례를 수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5,000여 명의 감독이 사막으로 추방되기도 한다. 483년 훈네리크는 아프리카의 모든 가톨릭 주교들에게 아리안 대표들과의 토론에 참석하도록 명령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니케아의 성직자들이 집회하거나 세례와 안수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했고, 니케아의 교회를 폐쇄하고 재산을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훈네리크의 후임자였던 군타문트는 전임자보다는 가톨릭 신앙에 대해 더 나은 성향을 보여 주교들의 사막유배를 끝냈지만, 그의 뒤를 이은 트라사문트는 또다시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도입한다. 그러나 트라사문트 다음으로 왕으로 즉위한 힐데리크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이었던 어머니 에우도키아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온건한 정책을 펼친다.
힐데리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반달왕국의 군주에서는 보기 드물게 삼위일체 정통파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고, 그 스스로도 정통파로 개종하였다. 이후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카르타고의 주교구가 회복되었으며, 이에 잠깐이나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전쟁을 싫어하는 그의 모습에 불만을 가진 이들에 의하여 지나치게 관용적인 왕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위일체의 형성 과정 (1) | 2023.08.28 |
---|---|
사중복음의 현대적 의의 (0) | 2023.08.27 |
무엇이 우상숭배인가(신약편) (0) | 2023.08.25 |
무엇이 우상숭배인가(구약편) (1) | 2023.08.24 |
마르시온의 이단사상과 성경 정경화 (0) | 2023.08.23 |